고전 음악을 듣기 위해 콘서트홀을 찾아가는 단계가 있다면, 이마도 협주곡들이 그 제일 앞에 있지 않을까 한다. 오케스트라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일 뿐 아니라, 온몸을 파고드는 압도적인 음향이 주는 감동은 비교할 만한 것이 많지 않다. 여기에 솔로 악기의 아름다운 선율까지 더해지는 협주곡은 고전음악의 가장 매력적인 상품이다. 근대서양의 고전 음악은, 특히 관현악은 선동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협주곡들이 그 중에도 갑이다.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드보르작의 첼로, 그리고 브람스의 피아노 2번 등에 격동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본인의 공감능력을 의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 다음 단계는 아마도 교향곡일 것이다. 협주곡들의 경우 솔로 악기가 부각될 수 밖에 없어 대개 솔로이스트의 이름을 먼저 들여다 보게 된다면, 교향곡의 경우 일단 지휘자에 대해 묻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지휘자는 얼마나 많은 차이를 주는 것일까? 지휘자마다 얼마나 다른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일단 베토벤 5번의 여러 연주를 들어보는게 한가지 방법이다. 누구나 다 아는 1악장 도입부의 네마디, 그 강렬함을 취급하는 방식은 지휘자들 숫자 많큼 많을게다.
그런데, 20세기 지휘자 중 베토벤 5번의 대표선수를 단 하나 뽑는다면 누구일까? Furtwangler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Karayan이라고 하기도 할 테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대세는 2004년, 74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등진 Carlos Kleiber가 아닐까 한다.
Kleiber는 음반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주 자체도 많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정된 연주의 취소도 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89년 Karayan이 은퇴한 베를린 필에서 후임으로 그를 영입하고자 한 제안조차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Kleiber는 자기 집 냉장고가 비어야만 연주를 하는 사람” 이라고 한 Karayan의 반 농담, 상당히 일찍 은퇴를 해 버렸는데 나중에 Ingolstadt라는 곳에서의 특별연주에 대한 조건으로 본인 요구대로 튜닝된 Audi A8한대만 받는 것이 그의 조건의 전부였다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에서도 그의 범상하지 않음이 묻어난다.
이런 일화들을 듣다보면 괴팍한 천재라는 이미지가 남겠지만, 지휘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오래, 많이, 완벽하게 준비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레퍼토리가 유난히 짧았는데, 특히 1970년대 이후 대형 관현악으로는 하이든 교향곡 94, 모짜르트 33,36, 베토벤 4,5,6,7, 슈베르트 3,8, 브람스 2,4 정도가 전부였다. 하나의 작품 하나의 연주에 어마어마하게 공을 들였다고 하는데, 특히 명성을 쌓으면 쌓을수록 그 성향은 점점 더 강해졌고, 어쩌면 지휘자로서는 이른 은퇴를 해버린 것 역시, 이 완벽주의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게 아니었나 싶다.
그의 교향곡 녹음 중 다섯 작품이 비엔나 필하모닉과의 협업이다: 베토벤 5,7, 슈베르트 3,8, 그리고 브람스 4. 사실 그가 가장 오래, 근 20년간 인연을 맺고 있던 곳은 비엔나가 아닌 Bavarian State Opera의 오케스트라인데, 아무래도 오페라 전용 오케스트라의 한계가 있었지 않나 싶다. 물론 그가 관현악과 오페라에 모두 일가견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 중 베토벤 5번은 특히, 한번 들어보면 긴 이야기가 필요없다. 베토벤의 5번과 9번이 가진 아우라는 그 어떤 관현악곡보다도 강할 것인데, 그래서인지 이들의 연주들은 악단은 물론, 듣는 이들에게도 200%의 관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Kleiber의 베토벤 5번은 가벼운 터치와 빠름 템포 속에서 이러한 부담을 덜어낸, 다른 곳에서 들어본적이 없는 그런 연주인데, 특히 빠른 템포 속에서도 전혀 서두른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희한한 경험이다. 다만, 19세기 관현악에 흔히 보이는, 클라이맥스의 과장되고 인위적인 모습은 그 역시 피할 방법이 없었겠지만 말이다.
사실, 작가는 Kleiber를 브람스 4번과 베토벤 7번으로 먼저 접했다. 콘서트 홀을 가는 번거러움보다는 집에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오디오를 선호하다보니, 제대로 재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대편성보다는 소편성으로 충분한 실내악을 주로 즐긴다. 스케일이 큰 교향곡, 합창곡, 오페라등은 자주 듣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이런 대편성 작품들은 넓게 두루두루 듣지 않는 편이다. 한동안 George Szell의 브람스 3번을 편식하다가, 파사디나에 있는 Pacific Hastings Mall의 음반가게에서 우연히 집어든 그의 브람스 4번으로 갈아탄게 그를 발견하는 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늦가을 같은 브람스의 곡들 중에서도 비장함과 어두움의 끝판왕인 이 작품은, 사실, 누구의 연주이더라도 매력적일 수 밖에 없는 곡이지만, Kleiber 특유의 정교함이 그 만큼 더 나를 사로잡았고, 아직도 음반으로 즐겨듣는 몇 안되는 교향곡 중 하나로 남아있다. 여전히 템포는 빠른 편이지만,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연주인데, 당시에는 잘 몰랐으나 그의 베토벤 5번의 경우 만큼이나 브람스 4번의 소위 레퍼런스 음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단다.
브람스 4번의 백미는 물론 마지막 악장이다. 브람스가 초연에 앞서, 한 저녁모임에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 교향곡의 선율을 들려 주었을 때 나온 반응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데, 요즘 말로 "갑분싸” 정도?... Kalbeck이라는 작가는 심지어 다음날 아침 집에까지 찾아와서 4악장만 따로 출판하고 나머지는 발표를 포기하라고 간청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실 이 4악장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따로 출판하라고 했던 말 자체는 충분히 수긍이 되는데, 바흐의 칸타타 (BWV. 150)에서 빌려온 샤콘느 테마를 서른 번에 걸쳐 변주하는 형식을 가진, 이전까지의 교향곡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구성이다.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Op. 130의 마지막 악장이었다가, 그 무지막지함을 걱정한 출판사의 간청으로 인해 따로 출판된 Gross Fuge에 비견될 만한, 그 자체로도 19세기 관현악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만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앞서 투덜거린대로 작가는 19세기 교향곡들의 마지막 악장을, 베토벤의 9번의 그것을 포함하여, 매우 부담스러워 하는 편인데, 브람스 4번은 많지 않은 예외중 하나이다. 이 악장은 마치 “절정에 이른다는 건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는거야”라고 말하는 듯 하다.
트롬본이 시작한 테마를 목관이 이어받고, 뒤에서 받혀주던 현은 이를 건네받아 거대한 파도를 일으킨다. 현이 잔잔해지면서 배경으로 숨어들면, 다시 플룻의 가냘픈 소리에 집중되고, 다시 목관이 들어오고 금관이 가세하면서 곧바로 현이 참견을 하는가 싶다가 이내 다시 관악기들의 목소리가 들어온다. 테마를 끌고가는 관과 오고 가며 파도치는 현의 대화는 계속되고, 이내 절정에 다다른다. 자연스럽게 이 여러 다른 소리들을 Gross Fuge처럼 대위법으로 묶이게 되는데, 관현악이 관과 현의 조합이라는 것을 이 만큼 완벽하게 보여주는 예가 또 있을까?
베토벤의 5번, 6번, 그리고 거대한 9번 사이에 낀 7번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덜 알려져 있으나, 작가 개인적으로는 그의 모든 교향곡 중 가장 선호하는 곡이다. 베토벤 7번은 기본적으로 무곡이다. Wagner가 이 교향곡을 “Apotheosis of dance”, 즉 무곡을 신화적인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고 평가했다고 하는데, 적절한 찬사가 아닐까 한다.
사실 서양 고전음악에는 유독 무곡들과 관련된 작품들이 많이 보이는데, 앞서 이야기한 헨델의 키보드 조곡이나 바흐의 첼로 조곡과 같이 전체가 무곡의 형식을 띈 경우 뿐만 아니라, 위 브람스 4번의 마지막 악장의 경우처럼 단순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무곡 테마에서 시작하여, 그 테마만 듣고는 상상하기 힘든 스케일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회 생활의 한 축을 무도회가 담당했을 중세 이후 서양의 귀족계급의 문화를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춤곡은 당연히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그래서인지 7번을 들을 때와 5번/9번을 들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후자가 청중을 압도하여 감탄하게 하는 음악이라면, 전자는 경쾌한 리듬속에 청중을 즐겁게 하는 음악이다. 이는 물론 베토벤이라는, 마치 고뇌의 상징과도 같은 작곡가를 감안했을 때 할 수 있는, 상대적인 이야기이다. 베토벤에게서 요한 스트라우스를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나?
브람스 4번의 백미가 4악장이라면 베토벤 7번의 그것은 2악장 Allegretto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매우 성공적이었던 초연때부터 2악장은 특히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데, 심지어는 베토벤 본인이 지휘한 초연 당시 청중의 요구로 이 한 악장을 앙코르로 다시 연주했다고 한다.
2악장은 다른 악장들에 비해서는 조금 더 차분하고, 리듬보다는 조금 더 멜로디에 치중한 모습이다. 시작과 함께 현이 소개하고 전개하는, 마치 장송곡과도 같은 어두운 테마가 한차례 절정을 향해 치닫고 나면, 목관이 이어 받아 차분하게 이끌어간다. 간간히 들리는 금관과, 현의 보조아래 목관의 멜로디가 아름답게 이어지다가 조신한 피치카토로 긴 여운을 남기고 끝나는데, 이는 물론 다시 리듬감 가득한 3악장을 준비하는 숨고르기이다.
전체적으로 경쾌한 리듬과 아름다운 선율로 청중을 사로잡는 이 작품에 대한 비난도 없지 않았다는데, Clara Schumann의 아버지인 Wieck은 베토벤이 이 곡을 술에 취한 채 쓴 것 같다고 했다고도 하고, 영국의 가장 널리 알려진 지휘자 Beecham은 3악장을 날뛰는 네발 동물(Yak)에 비유했다고 하니, 사람의 취향이란 참으로 다양한게 분명하다.
하여튼, 요즘 Kleiber의 베토벤 5번과 7번을 하나의 CD에 넣어 놓은 합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혹시 보이면, 아무 생각하지 말고 가격 따지지 말고 그냥 한장 들여놓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