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까마귀_미우 글, 그림>
나는 보통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켜놓고 글을 끄적이거나 부추전이 익을 때를 기다리며 시를 한편 읽는다던지 아니면 인디밴드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책장을 뒤져 떠돌이 철학자 이야기책을 꺼내 읽거나 했다. 한마디로 산만했고 멀티가 가능했다. 학교 다닐 땐 음악을 들으며 공부를 했다. 특히 수업시간에 하는 전혀 다른 짓(?)엔 박진감 넘쳤고 도가 텄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번에 하나씩 아니, 집중해서 한 가지를 했는데도 뭔가를 빠트리고 2% 부족한 나를 쉽게 볼 수 있다. 기억나지 않는 사소한 것 때문에 늘 자신이 한심하고 밉다. 이제는 뭐 거의 포기다. ‘나이 들면 다 이런 거다’를 주문한다. 전혀 위로는 되지 않지만 위로받는 척 한다.
어릴 때는 내 머리 속엔 몇 개의 방이 있다고 생각했고 각 방에서 각각의 내가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온통 마음과 머리의 방이 하나 밖에 없는 것만 같다. 어느 작가의 ‘마음은 단칸방’이란 말을 실감한다.
사회적 가면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많아져야 생활이 편리해지지만 난 반대로 점점 가면은 없어지고 민낯으로 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나밖에 될 수 없다. 아니, 나처럼 사는 것은 나밖에 없기에 요즘 더욱 나에게 파고들고 있는 듯하다.
내 숨을 쉬어야겠다고 결심하며 미우작가가 쓰고 그린 <나는 까마귀>를 나의 단칸방 마음에 들인다. 작가는 까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기던 어느 날 연암 선생의 글을 만나면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아마도 완전한 색, 검정에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연암은 까마귀의 검은 빛을 향하여 유금빛이나 석록색,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되고 비취색으로 바뀐다 하여, 까마귀는 푸른 까마귀도 붉은 까마귀로도 불러도 될 만하다는 말이다.
하여간 작품 속에서는 그렇게 모든 색을 다 갖고 있는 까마귀가 날개를 다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까마귀는 자신의 날개 색과 비슷한 겨울 숲으로 숨는다. 그리고 이것저것 주워 모아 몸을 가린다.
바람에 실려 오는 소문은 까맣고 불길한 새, 음침한 까마귀는 숨어도 숨어지지 않는다고 발 없는 소문은 떠들고 있었다. 까마귀는 더욱 자신의 색을 감추고 다른 새의 깃털로 자신을 꾸미기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까마귀는 본래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괜히 가슴을 졸인다. 생각해보면 소문보다 자신을 규정하고 한계를 짓는 것은 까마귀 본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지옥은 공간이 아니라 상황이다. 타인과 합세해서 자신을 자꾸 절망으로 몰아넣으려는 마음은 어디서 시작 된 것일까, 부러져 초라해진 날개를 보듬고 위로하기보다 자신에게 겨눠진 화살을 피하느라 애쓰는 까마귀는 자신을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상처는 잘 낫지 않는다. 매일 상처를 생각할수록, 매몰될수록 자기 파괴만 될 뿐이다. 하지만 또 어느 순간 낫는 게 상처다. 살다보면 나아지는 게 상처다. 그저 그날을 살아내면서 시간을 허비해 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까, 까마귀가 옆에 있다면 말을 해주고 싶었다.
공작의 깃털을 붙인다고 공작이 되는 게 아니듯이 잠시는 스스로도 속이고 다른 누군가처럼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나는 내가 되어 사는 게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징조도 없이 그날은 찾아온다.
“까마귀 색이 저렇게 아름다워요?”
“그래, 까마귀가 늘 까맣기만 한 건 아니지,
하늘빛에 물들어 금빛으로도, 자줏빛으로도, 비취빛으로도 빛나거든”
까마귀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 눈이 번쩍 뜨였다고 했다. 자신도 몰랐다. 까만 깃털이 환경에 따라 화려한 다른 색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날개를 다쳤지만 저 희망찬 대화를 듣고 날아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때의 날개는 아마도 이미 나아 있었을 것이리라.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편견과 평가와 선입견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까마귀는 미리 자신이 그런 존재로 스스로 낙인찍었다.
나만의 빛깔을 오래 관찰하고 자세하게 들여다본다면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존재인지, 굳이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아도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사랑으로 바라본다면 가능하다.
요즘, 내용을 형식에 담는 것에 대한 생각이 많다. 예전엔 그저 자유하고 멋대로 살고 싶었고 그러기위해 괜한 오기와 패기를 부리며 상처에도 쿨한 척 나를 방관했던 시간이 스스로에게 미안하다. 자유로운 영혼이 형식 따위에 담기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내용은 좋은 형식에 담아야 훨씬 빛날 수 있다. 새삼스레 안과 밖의 통합이 진정한 아름다운 것 임을 깨닫는다.
‘나’라는 존재 안에 좋은 친구를 선물하고 좋은 음악과 환경을 얹어준다. 소박하지만 단단한 사유를 위한 한권의 책과 커피를 맛있게 블랜딩 해서 내놓은 찻집을 찾는다.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고민 하고 무엇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내어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는 쉼을 준다.
단칸방 내 마음에 차곡차곡 나를 위한 것들로 채우고 싶다. 한때는 무례했고 까마귀처럼 자신을 회피했던 스스로를 용서하고 화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