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패셔니스타 Nov 24. 2023

여행, 공포에서 환희로 (1)

가족 여행 치유기

 “엄마, 내일 우리 여행가요?”

 “응, 서영이가 누나니까 동생 잘 챙기고 의젓하게 행동할 수 있지?”

 “네, 저는 이제 중학생이예요.”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서영이와 여행을 가다니. 그것도 3박 4일이나. 새로 산 캐리어를 방 한구석에 열어 두고 설렘 반 걱정 반 며칠 동안 짐을 챙겼다.


 우리 가족은 여행이 즐겁지 않았다. 아니, 오래전부터 여행은 오히려 공포에 가까웠다. 잔뜩 기대하고 떠났던 거제도 여행이 악몽으로 변했던 날부터였다. 서영이는 낯선 환경에서 배가 자주 아프다고 했다. 자주 다니러 가는 외갓집에서도 서영이는 화장실을 연신 들락날락했다. 병원에도 여러 번 갔지만 유산균 처방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때 나는 대구의 한 학원가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남편은 IMF 여파로 일하던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했다. 해고 후 사업을 해 보겠다며 쫓아 다녔지만 별 소득 없이 몇 년이 훌쩍 지나갔다.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던 시절, 직장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게다가 남편이 일했던 전산 분야는 자동화가 진행되면서 더 이상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구직 사이트나 지인의 소개로 몇 군데 취업도 해 보았지만, 며칠 다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그만두기를 몇 년.


  IMF 시절 정리해고와 더불어 수많은 개미군단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주식투자는 우리 부부 또한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남편은 일을 쉬는 동안 퇴직금 중 일부로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처음엔 100만 원, 그다음엔 200만 원으로 차트를 보며 나름 분석한 종목에 투자했다. 사는 족족 물렸고, 주가가 떨어질 때 만회해 보겠다며 저가 매수한 주식도 불안한 주식장에 휴지 조각이 되었다. 남편의 퇴직금은 진작에 사라졌다. 저축을 깼고, 다음엔 신혼 때 시아버님께서 사 주신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았고, 마지막엔 가족들에게 한 달만 쓰고 돌려줄 테니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쯤 되면 예상했어야 했다. 주식투자에 기적은 없다는 걸. 정신 차리고 보니 6년간 일했던 회사에서 받았던 내 퇴직금과 저축해 놓은 돈은 물론이고 집까지 다 날린 후였다. 1억이 넘는 카드빚을 안고 시댁에서 살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망연자실한 남편을 대신해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아기 분윳값도 벌어야 하고, 빚도 갚아야 했다. 늦은 나이에 귀한 아이가 우리 곁에 와서 더할 나위 없이 기뻤지만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출산 후 100일이 지나고 곧바로 학원에 복귀했다. 새벽 6시 반 성인 대상 영어 회화 수업부터 늦은 밤까지 과외를 하며 투잡, 쓰리잡을 뛰었다. 밤늦게까지 엄마를 찾다 품에 안겨 잠든 아이를 살며시 떼어 놓고는 새벽밥 먹고 집을 나섰다. 몸을 무리하게 쓰며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생활이 2년 넘게 이어졌다. 번아웃이 왔다. 가끔은 깨어 있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없었고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날도 넋이 나가 쉬는 시간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원장님께서 잠깐 보자며 부르셨다.

“선생님, 내가 아는 분이 거제도에서 펜션을 운영하시거든. 예약해 놓을테니 주말에 가족끼리 다녀올래요?”

아이 있는 강사는 퇴근 너무 늦으면 안 된다며 수업 시간도 조정해 주시고 힘들 때마다 내 이야기를 들어 주시던 고마운 원장님이셨다.

 “너무 달려서 그래. 선생님한텐 지금 특별한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준비했어요. 서영이 데리고 하루 푹 쉬다 와요.”

 상사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직장인이 몇이나 될까. 힘들다고 슬쩍 넋두리했을 뿐인데 이런 큰 선물을 받다니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 기회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하고 돌아와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 가족끼리는 처음 타지에서 1박을 하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너무나 설렜다. 출발하기 일주일 전부터 일하는 틈틈이 먹거리며 옷가지며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빠짐없이 챙겼다.


 드디어 여행 당일. 혹시라도 서영이가 이동 중에 배가 아프다고 할까 봐 휴게소 화장실마다 들르며 쉬엄쉬엄 가다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숙소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낯선 펜션 입구부터 움찔거리며 들어가길 망설이던 아이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내 등에 딱 붙어 떨어지질 않고 악을 쓰며 울어댔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저녁을 먹을 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설거지를 하고는 펜션 근처 구경이고 뭐고 대충 씻겨 재우려 했지만 아이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남편은 오랜만의 장거리 운전으로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고 나는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고 자다 깨다 하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체크 아웃하고 나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그래도 거제도까지 왔는데 외도는 한번 가 봐야지.” 하는 남편의 말에 외도행 유람선에 올라탔다. 바다 위를 쾌속 질주하는 배에서부터 외도를 한 바퀴 돌고 나올 때까지 서영이는 계속 빽빽대며 울어댔다. 푹푹 찌는 날씨, 내 몸에서 피어나는 열기에 아이가 품을 파고들며 악을 쓰는 열기까지 전해지니 찐득한 땀으로 샤워를 한 것 같았다. 출발 후 얼마 안 되어 선장님이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를 켜고 먼 바다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에 대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선장님 목소리에 서영이 울음소리까지 합세한 아득한 소음에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함께 배를 탄 사람들도 처음엔 가만히 있더니 흘낏거리며 한 마디씩 입을 보태기 시작했다.

 “애기엄마, 애 어디 아픈 거 아녜요? ”

 “어떻게 애 좀 달래봐요. 시끄러워 죽겠네. ”

 “얘야, 그만 뚝! 엄마 힘들겠다. ”

 주위 사람들 눈치가 보여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우린 아직도 외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우는 아이를 번갈아 업고 오르느라 외도 오르막을 오르느라 영혼이 탈탈 털린 채 일찌감치 선착장으로 나와 배를 기다렸다.


 “아, 내가 다시는 여행가나 봐라.”

 한참을 울었는지 목이 쉬어 잠잠해진 아이를 안고 거제도 선착장에 내린 후 다시 차를 타고 대구로 올라가는 길. 긴장이 풀려서 꾸벅꾸벅 졸음이 몰려왔다. 그런데 또!

 서영이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했다. 차 안에서 곤히 자고 있길래 이제야 좀 진정됐구나 싶어서 ‘휴게소 한 군데쯤이야’ 하며 건너 뛴 것이 화근이었다. 다음 휴게소까지 20분은 더 가야 하는데 아이는 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얼굴이 시뻘개져서 금방이라도 나올 듯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하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톨게이트로 빛의 속도로 빠져나와 아이를 안고 총알같이 고속도로 관리 사무소로 직행했다. 아이가 용변을 보는 동안 가뜩이나 먼 집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더 멀어질지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남편대로 화장실 물색하느라 용을 쓰고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결국 돌고 돌아 한밤중이 다 되어 집에 돌아왔다. 쌔근쌔근 편안하게 잠든 아이를 보며 우리 부부는 앞으로 장거리 여행이나 1박 여행은 절대 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서영이가 네 살. ”늦된 아이가 더 똑똑하게 크니 걱정 말라.“ 는 시어머니 말씀을 철썩같이 믿고 싶어서 눈에 보이는 이상징후들을 애써 부인하며 검사를 미루고 있을 때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자폐 성향이 있는 발달장애아들은 일상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기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말을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우리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가게 되었고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아이에게 미리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독단적이고 무지했다. 모든 걸 내 기준에서 결정했고 나만 괜찮으면 모두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2편도 기다려주실거죠?

매거진의 이전글 어쩔 수 없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