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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셔니스타 Oct 04. 2024

아빠, 걔는 말을 안 해

걱정은 그만,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자

계단을 올라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한 화이트 벽지를 따라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큼지막한 글씨로 ‘OO 언어치료 연구소’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입구 게시판에 사진과 함께 원장의 약력이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특수교육학을 전공하고 상담 전문 대학원을 나와 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수년간 언어치료사와 상담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분은 서영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의 학부모였다.


 어린이집 원장님의 권유로 마지못해 약속 잡고 들어선 상담실은 이른 오전이라 조용했다. 근심과 불안을 감출 수 없어 긴장한 우리 부부를 그분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반갑게 맞이했다. 언어치료라는 낯선 직업을 접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화이트 벽지에서 풍기는 엄숙한 분위기 탓에 나는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따끈한 차 한 모금을 마셔도 쉽사리 풀리지 않는 긴장을 물리치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우리에게 치료실 원장은 자기 아이 이야기를 하며 말문을 열었다.


 “약속을 잡고 저희 아이한테 서영이가 어떤 친구인지 물어봤어요. 아이가 “아빠, 걔는 말을 안 해.”라고 하더군요.”


 얇은 막대기 위에서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던 무거운 납덩이가 가슴속에 철렁 내려앉았다.

 며칠 전 어린이집 원장님이 면담을 요청했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면 교사를 통해 전화 통화로 전달하면 될 일을 굳이 어린이집까지 와서 차를 한잔하자는 거였다. 그 무렵 세 식구 첫 1박 여행에서 내내 생떼를 쓰는 통에 곤욕을 치른 일도 있었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네.” 또는 “응.” 대신 묻는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반향어가 지속되어 나의 불안은 극에 달해 있었다.


 다음 날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달려간 어린이집에서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원장님 앞에 앉아 있었다. 아이를 유심히 살피다 보니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아이나 선생님이 서영이의 이름을 불러도 아무 반응이 없다, 여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 전혀 흥미가 없다,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기는 하지만 혼자 벽 보고 앉아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 다른 곳을 응시한다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아이가 그럴 수도 있죠.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간 밤낮으로 긴가민가 걱정하던 모든 일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차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원장님은 언어치료 상담가인 세아 아버지를 소개해 주셨다.


 평소 석연치 않았던 부분을 말씀드리는 내내 세아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발달 장애를 의심해 볼 수 있으나 일단 전문 기관에서 발달 검사를 먼저 받고 이후 치료와 교육을 생각해도 늦지 않다며 대구대 특수교육원을 추천해 주셨다. ‘특수교육원’이라는 생소한 이름에 당황하는 나에게 설문 조사와 상담으로 아이의 발달상태를 세밀하게 점검하는 곳이라 했다. 보통 여섯 살이면 의사 표현을 짧게나마 할 수 있는데 그 점만 보아도 분명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세아 아버지의 의견이었다.

 

 서영이를 ‘특수’라는 단어와 연관 짓고 싶지 않았던 우리 부부도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말, 학원만 가도 지겹게 듣는 아이들의 말,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그 흔한 말을 그동안 우리 아이에게서는 한마디도 들어본 적 없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백일이 지나자마자 젖도 안 뗀 아이를 시어머님께 맡겨놓고 일하느라 바빠서 그런 걸까? 물에 젖은 소금처럼 아무리 피곤해도 아이와 시간을 더 보냈어야 했나? 어릴 때 걷기 연습한다고 저만치 세워 놓았다 아이가 뒤로 넘어진 일도 기억났다. 딱딱한 바닥에 머리를 세게 찧었는데 혹시 그것 때문일까? 예정일이 지나도 소식 없는 아이를 제왕절개로 바로 낳았어야 했는데 미련하게 자연분만하겠다고 우겼던 일도 있었다. 유도분만을 너무 오래 해서 아이의 뇌에 이상이 생긴 걸까? ‘혹시’를 ‘에이, 설마 아니겠지.’라며 넘겼던 수많은 억측이 날아와 가슴에 날카롭게 내리 꽂혔다.


 첫걸음을 뗐을 때처럼 말문이 트이는 것도 그저 시간이 좀 걸릴 뿐이라며 자위했던 그간의 기다림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순간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오늘이라도 아이가 입 밖으로 한마디만 꺼내준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아득해진 정신이 높은 절벽에서 끝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말도 못 하는 여섯 살 아이를 평범한 아이로 키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까? 시간과 인내를 들이면 여느 아이처럼 자랄 수는 있을까? 그 시간과 인내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리 외쳐도 답이 없는 수많은 질문과 책망이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와 가슴을 때렸다. 뜨거운 감정이 훅 솟구치며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낯선 이를 앞에 두고 의연한 척하면 할수록 눈치 없는 눈물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구멍을 타고 계속 줄줄 흘러내렸다.


 두려운 마음에 전전긍긍하다 찾아간 곳에서 아이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우리는 그때부터 몸이 달았다. 먼저 상담과 검사를 받고 치료센터를 물색했다. 아이에게 가장 시급한 언어치료와 인지치료부터 시작했다. 어린이집 원장님과 상의한 끝에 어린이집도 옮기기로 했다. 일반 어린이집에서 행해지는 교육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서영이에게 효과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판단에서였다.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장애 어린이집을 알아보던 중 통합 어린이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애 어린이집에 보내면 아이의 다음 목적지는 장애 학교가 되는 게 아닐까?’


 아이가 겪게 될 일상에 ‘장애’나 ‘특수’ 같은 접두어가 평생 따라붙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또렷한 색깔로 기억되지는 않더라도 서영이는 평범한 아이들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하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했다. 통합 어린이집이 어떤 곳인지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장애 어린이를 세 명까지 수용할 수 있으며 한 명만 더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다급한 나머지 상담 예약도 하지 않고 무작정 그곳을 방문했다.     

통합 어린이집에서 만난 희망

 연세 지긋하고 인상 좋은 부부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은 주택가의 오르막에 있었다. 전에 다니던 어린이집은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딱딱한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문은 늘 굳게 잠겨 있어서 방문할 때면 초인종을 누르고 인터폰으로 누구 엄마라는 확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야외 활동이래야 간혹 가까운 공원에서 산책하는 정도여서 아이들은 주로 실내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통합 어린이집은 입구에서도 통창을 통해 아이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안이 훤히 보였다. 작은 정원에는 아이들이 땅을 파헤치며 놀았는지 마른 흙이 묻은 조그마한 호미며 모종삽이 널브러져 있었다. 원장의 남편인 듯한 분이 밀짚모자를 쓰고 화단과 놀이터를 손보고 있었다. 우리가 차에서 내려 인사하자 그는 엉거주춤 일어나 구슬땀을 목수건으로 닦으며 활짝 웃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입구에 들어설 때 내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잔뜩 긴장해 있던 서영이도 아기자기한 스머프 집 같은 내부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여기저기를 다니며 기웃거렸다. 창문 너머로 또래 친구들이 무리 지어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가 갑자기 교실로 불쑥 들어가는 바람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도로 데리고 나오려 하자 선생님 한 분이 괜찮다며 아이들 노는 틈으로 딸아이를 데려갔다. 한 아이가 자기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건네자 서영이는 두 손으로 받아 쥐고 놀이대열에 동참했다. 이제 엄마는 안중에도 없었다. 평소와 달리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 사이에서도 편안해 보이는 딸아이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통합 어린이집의 첫인상 덕분에 원장님과의 상담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혹시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조바심을 냈는데 다행히 장애 어린이를 한 명 더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정말 기뻤다. 근처에 작은 대학교 캠퍼스가 있어 하루 한 번 교정을 산책하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교외 텃밭에서 감자, 고구마, 상추를 가꾸며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뛰어놀 수 있게 하는 원장님의 교육관도 마음에 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 자주 나들이하지 못했던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채워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원장님은 긴 시간 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며 아이의 상태를 알기까지 불안한 마음에 종종거렸던 내게 그간 얼마나 걱정이 많았느냐며 다독여 주셨다. 아이들 속에 자라고 있는 황금 씨앗을 믿어 보자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셨을 때 나는 너무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을 글썽였다. 그동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무던히도 애썼던 온갖 부정적인 말과 과거의 경험에만 미루어 아이의 한계를 미리 재단했던 사람들의 예언이 원장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기대감은 거리가 멀다는 단점마저 상쇄시켰다. 통원 차량이 집까지 못 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왕복 한 시간 거리였지만 남편은 흔쾌히 아이의 등 하원을 맡았다. 하원 후 치료센터로 아이를 데려가고 선생님과 상담하는 수고로움도 상대적으로 일이 자유로웠던 남편이 나를 대신했다.


 아이의 상태를 알고 밑바닥까지 내려가 절망했던 시기였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희망에 찼던 시기였다. 나는 조금씩 무너졌다가도 아이에게서 먼지 한 톨의 희망을 찾으며 긴 하루를 견뎠다. 아이의 현재를 인정했고 할 수 없는 것에 목매지 않기로 했다. 대신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아이의 눈높이에 우리의 눈을 조금씩 맞춰 나갔다. 한글이나 기본 연산 학습은 전혀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 않았다. 딸아이가 밝게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서영이가 처음으로 두 손을 앞에 모으고 배꼽 인사를 하며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집을 나섰던 날은 하루 종일 그 잔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텃밭에서 수염이 대롱대롱 달린 큼지막한 고구마를 고사리손으로 호미질하여 캐어 온 날엔 그 고구마를 쪄 먹으며 가족끼리 행복해했다. 대구의 여름 날씨가 40도에 육박했던 날 어린이집 앞마당에서 시원하게 물놀이 한 판 하고 초저녁부터 고꾸라져 큰 대자로 뻗어 자는 아이의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부었던 일도 기억난다.


 기억에서 꺼내 보기도 아까울 만큼 소중한 하루가 모여 12월이 되었다. 출근하려고 기분 좋게 집을 나선 나는 덜 마른 머리를 흩날리며 차에 올라탔다. 꾸물거리느라 조금 늦어서 마음이 급했다. 시동을 걸고 슬슬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차 한 대가 내 차의 후면을 세게 박았다. 평화로운 오후를 엉망으로 만든 사고로 혼비백산이 따로 없던 그날, 평온한 일상 속 행복을 만끽하던 우리에게 취학 통지서가 날아왔다.           


병원이나 상담센터만 있는 건 아니랍니다.      

 또래 아이와 다른 징후를 우리 아이에게서 발견하면 부모는 초조하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어요.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아 전전긍긍하다 보면 치료 시기를 놓칠 수도 있어요. 요즘은 과거에 비해 발달진단 센터나 치료센터가 정말 많죠. 원하면 어디서든 상담 절차를 밟을 수 있지만 의외로 선뜻 문 두드리기가 쉽지 않아 상담을 망설이는 부모가 적지 않아요. 그럴 때는 각 지역 특수교육지원센터에서 상담해 보기를 추천합니다.


 특수교육지원센터는 상담과 진단평가를 통해 장애 가능성을 조기에 발견하여 특수 교육 대상자를 선정하고 교육 지원하는 곳입니다. 진단 결과에 따라 치료지원 및 학습 보조 지원 또는 가족 상담을 지원받을 수도 있어요. 곧바로 소아정신과나 사설 아동 상담센터에 가 보셔도 좋지만, 관내 특수교육지원센터에서는 다양한 지원을 연계하고 도움받을 수 있으니 꼭 문의해 보세요.


 아이의 상태를 알고 나면 조급하고 불안하겠지만 우리 아이들도 발달을 멈춘 게 아니랍니다. 느리지만 조금씩 자신의 보폭에 맞추어 성장하고 있는 아이를 응원해 주세요. 아이도 엄마의 마음을 알고 더 사랑스럽게 자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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