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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드쉠 Nov 20. 2023

첫번 째 기억

천막, 벽이 없는 마법의 성

COVER. My bed - Tracy Emin 



내가 바깥. 집이 아닌 곳. 그러니까 home의 의미가 아닌 호텔 같은 곳을 포함해 건물이 아닌 곳에서 자는 사람을 처음 본 것은 다섯 살이거나 여섯 살 즈음이었다.

그 시절 캠핑 같은 레저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아마도 나는 단어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거였다. 비슷한 것이라면 여름에 한 번쯤은 부모님과 함께 계곡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던 여가,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차라리 진짜 레저로 캠핑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면 그 편이 더 이질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본 것은 정말 집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 일이 기억에 남은 것은 집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보여준 어떤 태도 때문이었으니까.


80년대식 단독주택이 모여있던 골목에서 큰 도로로 나가는 길, 아직 집이 지어지지 않은 공터가 넓게 펼쳐져있었다. 나와 동네 꼬마들은 공터에서 흙을 쌓고 놀기도 했고 그저 의미 없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뛰어다니기도 했다. 장마철이면 다져지지 않은 흙바닥으로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겼고 당연하단 듯이 우리는 신발을 더럽히며 흙탕물에 들어가 첨벙 대곤 했다. 그런 땅이었다.

날씨가 제법 추워지기 시작하는 늦가을이었다. 앞마당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수군대는 일은 낯선 것이 아니었으나, 그날은 왠지 대강 바른 시멘트 바닥으로 소리들이 스며들 듯 낮아져 있었고, 그 수상함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엄마는 주인집에 나를 맡기 고일을 나가 저녁 늦게야 돌아왔기 때문에, 나는 혼자였다. 나는 끼어들 수 없는 어른들의 일. 그 일이 무엇이든 나는 엄마가 돌아오는 시간까지 오롯이 그걸 혼자 견뎌야 할 것이었다.

계단 참에 앉아 있을 때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빨리 나오라고 했다. 그중 나이가 제일 많은 주인집 아들이 아홉 살쯤이었을 거다. 공터에 뭔가 보러 갈 게 있다고 했다. 어른들이 말하는 것도 그것이라고. 나는 방금 전 마당에서 느꼈던 수상함의 공기에 어쩐지 망설여졌지만, 그렇다고 혼자 마당에 남겨져있는 것도 무서웠기에 가장 뒷 쪽에서 느린 걸음으로 털래털래 무리를 따라나섰다.

골목을 나서는 사이 우리가 보러 갈 것이 무엇인지 들었지만, 나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정확히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게 왜 어른들이 모여 수군댈만한 일인지도.


그것은 ‘천막’이라는 단어였다. 그 공터에 동춘서커스의 천막이 섰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컸고, 반짝였고, 시끄러웠었다. 입장권을 받는 단원에 막혀 그때도 몰려갔던 우리 무리들은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반짝임과 웅성임만으로도 가슴이 솜사탕처럼 뭉게뭉게 부푸는 것만 같았다. 그런 천막을 말하는 건가. 그때 보았던 서커스의 반짝거림과 어른들의 수군댐은 쉽게 연결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그런 것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천막. 무언가 비밀스럽고 향긋한 화장품 향과, 핫도그나 팝콘처럼, 책에서나 보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음식 냄새가 날 것 같고, 흥이 오르는 음악, 빨갛고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그런 무엇.

골목에서 나와 큰길을 마주 보고 선 공터의 왼쪽 끝에 그게 보였다. 짧은 순간 내가 떠올린 그런 천막은 아니었다. 색깔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안에 들어갔을 때 저녁 햇살이 새어 들어오는 빛이 노르스름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미색이거나 주황색이 아니었을까. 이런 기억은 왜곡일 수 있다. 실제 그 천막의 색이 어떤 것이었던, 나는 지금 그걸 따스한 연노랑빛으로 기억한다.


‘집이 없는 사람이 있대’

‘그럼 저기서 잔다고?’

공터를 가로지르며 앞에선 아이들이 떠들었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 저기서 살려고 그런다고’

천막이 가까워지자 아이들은 점령지를 향하는 오합지졸의 신병들처럼 우르르 달려갔고, 우리는 평소보다 빠르게 공터를 가로질렀다. 하지만 정작 그 천막 앞에 이르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아이가 없었다. 집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가끔 대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고함을 치던 상이군인들처럼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적진을 향해 무모하게 달려왔지만, 정작 깃발을 꽂지는 못하고 있었다. 숲 속의 오두막이나 동굴, 버려진 성에 사는 저주받은 괴수들의 이야기가 동화 속에는 얼마나 많은가. 천막을 여는 순간 그 괴물이 우리 모두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잡아먹을지도 모르는데.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천막의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얼굴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그 틈이 벌어진 것은 안 쪽에서였다.

세상에. 맙소사.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천막을 걷고 안에서 누군가 나왔던 것이다.


우리가 앞에 선 사람은 흰 카라에 검은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여학생이었다.


그녀가 처음 건넨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 뭐 하니?‘라던가, ’왜 그래?‘라던가. 단어가 무엇이었던지 그 말은 너무 다정했고, 그녀가 입고 있는 교복처럼 정갈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아이들은 아무 말이나 떠들었다.

’ 진짜 여기서 살아요?‘ ’ 집이 없어요?‘


나는 그녀의 품위에 압도된 상태여서 어쩌다 우리가 그 천막 안까지 들어간 건지 알아챌 수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안이었다. 아니 그녀는 요정이어서, 순간 우리를 다른 세계로 불러온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그 안은 따듯했고, 노을에 비쳐 모든 것이 황금처럼 노랗게 보였다.

’ 들어와 볼래?‘라는 말은 분명 그녀가 했던 거 같다. 그래. 그건 주문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녀는 천막의 한쪽 벽을 따라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주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라면 박스 두어 개는 채울 양이었다. 책 옆으로 학교에서 쓰는 낡은 나무 책상이 있었고. 안 쪽에는 어쩐지 빤히 보면 안 될 것 같은 침상이 있었다. 그 시절 동네 가게 앞에 흔히 있던 나무로 짜고 그 위에 장판을 덮은 평상 같은 것이었다. 그 위에 아직 펴지 않은 이불이 그녀의 교복 카라처럼 얌전히 접혀있었다.

그 이상이 기억날 것도 같지만, 아마 어떤 부분은 내 상상일 수도 있다.

나는 오래도록 그 순간을 거듭 생각해 왔고, 그동안 내 안에서 그 공간은 오롯한 하나의 세계가 되었으니까.


나는 그때까지 그녀처럼 상냥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집이 없다는 것의 의미를 그때의 내가 알았을까. 막연한 공포가 더 컸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의 막막함을 뒤로하더라도, 우리가 찾아간 곳이 천막이 아니라 정말 그녀의 집이었더라도 그녀가 보여준 상냥함과 당당함은 당연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무뢰배 점령군들을 대하는 패전국의 공주처럼 우아함으로 우리를 굴복시켰다.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뱉는 질문들에 다 다정히 답을 해주었으며, 그 천막 안에서 유일하게 먹을 것으로 보이던 초록색의 사이다 한 병을 우리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열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 엄마는 없어요?‘라는 질문에 ’응 엄마는 안 계셔 ‘라고 답하던 그녀는 어떤 사연으로 그 공터의 천막에 그렇게 소박한 짐을 정리하고 있었던 걸까.


아이들은 무례한 질문 몇 번에 쉽게 김이 빠졌고, 우리 모두는 저녁을 먹으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그날 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내가 따뜻한 방 안에 누워있는 동안, 그녀는 저 황량한 공터의 찬바람 아래 누워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면 교복을 챙겨 입고, 등교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업을 마치면, 다시 그 천막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연히 이런 생각을 이런 문장으로 그때 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그때의 나는 그저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가여워진 그녀에게 어떤 마법 같은 일이 생기길 바랐다. 자고 나면 천막이 공주의 성으로 바뀌어있거나 하는.


천막은 며칠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아마도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줬으리라고 희망적인 기대를 한다. 그녀는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살면서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종종 그녀가 생각났다. 예상 못한 악천후에 고생을 하던 캠핑의 어느 밤에도 그녀를 떠올렸다. 밖에서 잔다는 건, 이런 일이었다는 걸.


캠핑을 하기 전과 후의 삶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에게 캠핑의 본질은 이런 것이었다.

주어진 상황을 마주하는 것.


좋은 장비로 소꿉놀이하듯 캠핑을 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먹고 잔다는 이 단순한 일이 이렇게도 마음을 흔들었던 건

그 안에 이 기억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초라함, 나의 연약함, 보잘것없음을 마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그리고 그녀가 지금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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