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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아 Aug 09. 2024

9 to 6 근무대신, 하루 3000배로 출근

산티아고 순례길 대신, 3000배 100일의 여정(2)

3000배와 직장생활의 가장 큰  공통점은 ‘시간’이다. 회사에서 하루 8시간 근무하듯, 3000배도 약 8시간이 걸린다.


새벽 2시 20분에 눈을 뜬다. 세수로 정신을 차리고 바나나로 에너지를 충전한다. 이온음료 대신, 따뜻한 물에 죽염을 타서 나만의 에너지 음료를 만든다. 2시 40분, 법당으로 5분 만에 출근한다. 부처님께 반 배를 올려 출근도장을 찍는다. 3000명의 부처님 명호가 적힌 <삼천배 삼천불> 경전을 펼친다. 스트레칭은 따로 없다. 2시 45분, 한 배 한 배 몸을 풀며 시작한다. 밤새 뻣뻣해진 다리와 무릎이 300배가 되면 점차 풀린다. 아침공양 목탁소리가 들릴 때까지, 3시간 동안 평균 1200~1400배를 한다. 5시 45분, 1차 출근이 끝난다.


공양이 끝난 뒤, 소화를 시키고 7시부터 어린이집 마냥 낮잠시간을 갖는다. 8시 알람을 맞춰둔다. 8시부터 10분간 뭉그적거리다 다시 2차 출근을 한다. 8시 10분, 몸은 다시 리셋된다. 다시 뻣뻣해진 몸을 푼다. 겨울 새벽의 추위보단 아침 햇살이 낫다. 시린 겨울도 아침이 되면 법당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법당 불을 다 끄고 있어도 들어오는 빛 덕분에 환하다. 햇살의 양으로 현재 시간을 가늠하고 광합성을 한다. 햇빛은 굳은 무릎도 녹인다. 11시 20분, 다시 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와 함께 2차 휴식을 한다. 이때쯤 되면 2500배 정도가 된다. 천도재가  있는 날이면, 12시까지 절할 수 있어 2600~2700배까지 한다. 고지가 코앞이다.


 점심엔 맛있는 반찬이 많이 나온다. 콩나물밥, 잔치국수 등 한 그릇 요리가 메인이 되기도 하고 잡채, 깐풍가지, 두부강정 등 가끔씩만 먹을 수 있는 특식이 나오기도 한다.

“내가 뭐랬지? 특식이 나오는 날엔 목 끝까지 채워. 절은 모르겠고 많이 먹어둬야 해.”

3000배를 300일 동안 했던 선배님 법우의 말씀이다. 오후에 절이 남아도, 특식은 귀하기에 잔뜩 먹으라 하셨다. 덮어두고 먹다 보면 배가 빵빵하게 불러온다.


소화를 시키고, 늦으면 2시쯤 올라가 남은 절을 끝낸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의 3000배 소요시간은 평균 7시간 30분. 직장인이 보통 하루 8시간 노동을 한다면, 3000배는 그들보다 일찍 출근해 일찍 퇴근한다. 또, 절은 ‘역량에 따라’ 퇴근시간을 앞당길 수 있다. 절이 느리면 10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속도가 빠른 법우들은 5시간 만에 끝내기도 한다. 나 역시, 100일이 끝날 때쯤은 익숙해져 5시간 30분 만에 끝나곤 했다. 그럼 오전에 절을 다 끝낼 수 있다. 나의 능력에 따른 조기퇴근. 얼마나 이상적인 노동 환경인가!


물론, 이건 평균 스케줄이다. 나의 컨디션, 날씨, 주변환경 등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다. 100일 중 첫 번째 날은 7시간 13분이 걸려 14:30에 끝났다. ‘이 정도 페이스를 유지하면, 절 끝나고도 자유시간이 많겠는데?'

2일 차 아침, 행복회로를 돌리던 나에게 무릎이 정신 차리라고 말했다. 사과 크기였던 무릎이 자몽이 되고 자몽이 두리안만큼 붓는 느낌이 났다. 3000배 선배인 오빠에게 카톡을 남겼다.

"무릎이 붓는 거 같은데?  이게 맞아?"

"아픔? 맨소래담 발라 ㅋㅋ"

파스 바르면 금방 가라앉겠지? 보살님들도 21일이 지나면 무릎이 익숙해진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근육통도 사라지겠지.


3일이 지나고, 5일이 지나고 무릎은 더욱 아파왔다. 3000배 하기 전엔, 1000배를 너무 쉽게 해서 무릎이 아플 거란 생각조차 못했다. 잠결엔 근육경련으로 혼자 움찔하며 몇 번이나 깼다. 깰 때마다 불안감에 시계를 봤다.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지 못해, 절이 늦어질까봐 두려웠다. 시작이 밀리면, 오후까지 절이 밀린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3000배 100일 기도했던 법우 중 한 명은 절이 늦어져 저녁 8시까지도 못 끝내, 3000배가 다 됐는데도 그날은 그냥 포기하고 다음 날 다시 시작했다'고. 다 왔는데 코앞에서 포기했다니. 너무 안타까웠지만 몸이 안 따라주는 날을 죽어도 안 된다. '3000배 100일' 기도의 규칙은 그날 안에 그날 절을 끝내야 하고 이월, 양도가 안된다. 또, 100일을 연속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몸이 너무 무리가 돼서 '오늘은 죽어도 못해' 상태거나 피치 못할 개인사정으로 외출해야 한다면 건너뛰어 조정하기도 한다. '보험 특약'같은 그러한 규칙들이 신경 쓰였다. 지각 걱정으로 피곤해서 잠이 쏟아지는데도 잠을 설치곤 했다.



입사 후 온보딩(onboarding)이 중요한 것처럼, 3000배도 초반에 자리가 잘 잡혀야 100일을 무사히 끝낼 수 있다. 몸 컨디션이 급격하게 변해 힘들었던 초창기를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건, 도반들 덕분이다.


기본적으로 공양주 보살님들이 있다. 우리 절엔 세 분의 공양주 보살님이 있다. 신도들이 100일 기도를 들어오면, 가장 힘든 곳이 공양간이다. 기도 들어온 신도들이 무사히 기도를 잘 끝낼 수 있도록, 메뉴 선정은 물론 낯선 식재료에 잘 적응하는지(예를 들어 방아잎, 제피, 산초 등)를 늘 신경 쓰시기 때문이다.


또 다른 도반으론 룸메이트 법우와 나보다 50일 먼저 기도 들어온 M보살님이 계셨다.

룸메이트 법우는 이 절에서 3년 기도를 하고 있어, 내가 들어오기 전에 혼자 방을 쓰고 있었다. 주로 법우들이 들어오면 룸메이트 법우와 같이 방을 쓰곤 했다. 작년에도 3000배 100일 기도 들어온 법우와 방을 같이 썼다고 한다. 룸메이트 법우는 온라인으로 학위과정을 밟고 있어, 시험기간이면 밤샘공부를 하곤 한다. 작년에도 시험기간 중에 100일 기도 들어온 법우와 방을 쓰다 보니 스트레스를 꽤 받은 듯했다. 내가 들어왔을 때도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대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법사님께서 늘 하신 말씀이 있다.

'3000배 100일 하는 법우와 그렇지 않은 법우가 방을 함께 쓰면 늘 싸운다.'

기도 들어오기 전부터 이 말을 들어 걱정도 컸다. 덧붙여 '방을 함께 쓰는 것도 수행이다'라고 하셨다. 나의 전적, 기숙사 4년, 셰어하우스 1년, 친구와 자취 1년, 친오빠와 자취 8년 차 동거 경력으로 이 정도는 큰 문제는 아니었다. 법사님 말씀대로 친했던 사람도 같이 살면 전혀 몰랐던 모습이 나오기에, 갈등이 생기기 쉽다. 그러나 '공동공간'을 같이 쓰면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과도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M보살님 역시, 나의 좋은 도반이 되었다. M보살님은 내가 법당에 올라가는 시간과 비슷하게 법당에 올라오셨다. 혼자보단 둘이 낫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새벽의 겨울 법당은 참 춥다. 절하고 있으면 보살님은 올라와 ‘춥지, 잘 잤나?’라는 등의 인사를 건네신다. 법당에도 보일러가 들어오지만, 어마어마한 전기세로 법회가 아닌 날엔 잘 틀지 않는다. 이른 새벽, 추운 법당을 둘의 온기로 점점 채운다.


법당에서만 만나는 또 다른 도반들이 있다. 새벽예불이 끝나는 4시 50분이 되면, 800배가 넘어간다. 예불이 끝나고 다들 나가면 혼자 법당에 남아 있다. 그때 나와 함께하는 친구는 '로봇청소기' 뿐. 보살님들은 로봇청소기를 '법당거사님'이라 부른다. 보통, 법당을 관리하는 소임을 맡은 분들을 '법당+OO(보살, 거사, 법우)라고 부른다. '법당청소'일을 맡은 로봇청소기는 감미로운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법당거사님'이 되었다.

"청소를 시작할게요."

청소시작 버튼을 누르면, 자기 집에서 나와 법당을 가로질러 위아래로 돌아다니며 청소한다. 나의 자리로 로봇청소기가 다가올 때면 은근 신이 난다. 좌복(절 방석) 아래, 발이 미끄러질까봐 깔아 둔 발방석을 핥고 가거나 내 옆을 지나가면 구경하고 말을 걸기도 한다.

"거기는 아니야. 지나가줘."

내가 있다는 걸 파악하면 혼자 돌아간다. 힘들었던 절도 로봇청소기를 구경하면 어느새 몇 백배가 지나가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로봇 청소기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또 다른 법당 도반은 라디오. 절이 힘들면서도 반복되는 절에 가끔 지겨울 때도 있다. 법당에 아무도 없으면 가끔 에어팟을 끼고 '배철수의 음악캠프(이하 배캠)'를 들었다. 지니뮤직에선 지난 방송의 '배캠'을 풀버전으로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배캠엔 '철수생각'이란 코너가 있다. 하나의 이슈나 이야깃거리에 대해 배철수 DJ의 생각을 들려준다. 그중 수능날 방송했던 철수생각은 계속 생각나 반복해서 들었다. 콘스탄틴 게오르규의 소설 <25시>를 수험생의 시간을 엮어 다뤘다.


대부분 1시라고 부르는 시간을 25시라고 부른 작가를 생각한다. 크로노스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객관적 시간, 카이로스는 한 사람의 구체적 시간, 나아가 특별한 경험과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주관적 시간을 뜻한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에겐 그저 그런 날이고, 누군가에겐 일생의 중요한 체험의 날이 될 것이다.

 소설 속 농부 모리츠는 절규했다. 내 인생은 새로운 시간의 1시가 아닌, 어제의 절망과 불안의 연속인 25시로 가고 있냐고.

수험장을 나오면서 25시를 받아 드는 수험생이 있을 것이다. 게오르규는 열쇠를 쥐어준다. 열쇠는 새로운 문제를 풀라고 주어진 물건이다.

- 2023년 11월 16일 '배철수의 음악캠프' 중에서


몸은 계속 움직이고, 머리는 라디오의 이야기 속에 빠져든다. 길다고 느낀 100일과, 노동시간과 동일한 약 8시간의 절 수행이 나에게 중요한 체험이 될 '25시'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다시없을 일생의 100일의 시간은 어쩌면 내 삶을 새로이 여는 열쇠일 수도 있겠다고. 한참 라디오에 빠져들면, 아침공양 목탁 소리가 들린다.


회사 생활 역시, '동료 덕분에' 힘든 순간을 넘기기도 하고, 지긋지긋한 상사로 회사를 떠나기도 한다. 3000배도 나의 친애하는 도반들 덕분에 기도할 힘을 얻었고, 그들 때문에 번뇌하는 순간들도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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