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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Apr 29. 2024

결국 문제는 내 감정이었다.

내 안의 감정 읽기.

“아이는 한 번에 말을 듣지 않습니다. 두 번, 세 번, 백번이든 가르쳐 줘야 하는 겁니다.”

내가 존경하는 오은영 선생님이 자주 하시는 말이다.

아이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 그게 훈육의 본질이자 훈육을 해야 하는 이유라고.

작은 사회인 가정을 통해 아이가 평화롭고 민주적이며 규칙은 단호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여 사회에 나가서도 다른 사람들과 잘 화합하여 지내도록 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 가정의 기능일진대 나는 이 본질을 까먹고 눈앞에 닥친 아이의 잘못,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에 꽂혀 버린다.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

두세 번 아이의 잘못이 반복된다 싶으면 나오는 나의 신경질 적인 말이다.

매번 가야 하는 학교, 유치원. 갈 때마다 실랑이를 벌이는 첫째 딸과 말씨름하다 손이 많이 가야 하는 둘째와 준비하다 또 실랑이하게 된다.

둘 다 보내고 나면 아침 9시인데도 하루를 다 산 것처럼 기가 소진되어 버린 기분이 된다.

육아서적을 읽고,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면서 아 저런 걸 하면 안 되는구나 이것저것 배우는 데도 왜 이렇게 내게 육아는 힘이 든 건지.

지난 주말, 온갖 떼를 쓰던 감정의 폭풍이 지나고 잠잠한 파도가 되어 기분 좋게 일렁이는 둘째를 보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아직 미숙하기에 안 되면 짜증을 내고, 뭔가 불편할 때는 특히 감정적으로 가깝다고 느끼는 엄마에게 그걸 쏟아붓는 식의 나날이 반복이다. 그러고 감정이 조금 잦아들고 평온해지면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밝아지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결국 감정을 길게 끌고 가고 있는 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때문에 힘들다 힘들다. 그런 기억들이 겹겹이 쌓여 지쳐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이들은 그냥 자신의 본능대로 할 뿐인데 그걸 가장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건 결국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행동에 따른 훈육으로 지침을 주고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내 기분도, 아이 기분도 상해서 결국 상처 주는 말을 내뱉게 되는 건 결국 내 감정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특히 첫째를 키울 때는 그 모든 상황들이 다 처음이고 무지했던 탓에 보이지 않았는데 둘째를 키우다 보니 조금 보일 때가 있었다.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인가.

나는 진정되어 장난감으로 놀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떼를 쓰고, 소리를 지르고, 울어도 엄마는 너를 사랑해. 그런 행동을 하더라도 엄마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엄마도 사람이기 때문에 계속 그렇게 행동하면 엄마도 힘들어. 화가 나기도 하고. 그러지 말고 정확하게 어떻게 해줬으면 좋을지 얘기해 주면 좋겠다.”

떼를 쓰면서 쓸데없이 잘 가던 화장실에 같이 가자는 둥, 밥을 먹여 달라는 둥 요구하는 이유는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향한 엄마의 애정이 줄곧 충만한 사랑인지를 확인하는 갈급한 요구들.

나는 아이가 안심할 수 있도록 충분히 얘기해 주었다.

엄마의 인상이 구겨지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아직 날 사랑하는 걸까? 하고 확인하고 싶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해주었더니 후련한 표정이라 다행이었다.

그 후련한 표정을 지켜보는데 결국 나는 내 감정에 휘둘려서 아이의 그런 요구와 표현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아이가 안락하던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까무러치듯 울며 세상에 나오는 것처럼 엄마도 아이가 나오면 뇌에서 뭔가 탁 바뀌는 기능이 있어 육아 만렙 방법이 각인되듯 프로세스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훈육 시 이런 행동을,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표현을.

이런 ‘엄마 매뉴얼’ 프로세스가 삽입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러면 또 우리는 인간 고유의 빛을 잃게 되겠지?

모든 엄마의 반응과 대응, 매뉴얼이 같다면 아이는 똑같이 성장할 테고 그럼 인간의 경험치로 만들어지는 인간 고유의 특성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참 어렵다. 엄마라는 위치는.

나 자신 역시 성숙하지 못한데 그러면서도 더 미성숙한 자녀들을 챙겨야 한다니.

아이를 키우며 진짜 어른이 된 다는 어른들의 옛말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바이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은유 작가님의 ‘쓰기의 말들’을 읽으며 그런 얘길 나눴었다.

다시 또 아이를 낳으라고 하면 낳겠느냐고.

드라마에서처럼 아이는 나의 행복이니까 당연하지! 이렇게 선뜻 말하지 못하는 건 아마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도 어렵다는 걸 우리가 잘 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도 분명히 있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내 안에 많은 경험들을 글로 녹여내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럴 필요도, 아니 어쩌면 그 필요성 자체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저 살아갔을 것이다. 나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고 번민과 고민만 많은 고집쟁이 인간이 되어있을지도.

어쨌든 그 고행의 길을 다시 가라고 한다면 기꺼이 다시 가겠노라 자신 있게 말을 하진 못하지만 우린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도 삶의 깊이가 깊어지는 건 느낀다고.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나를 투영해 돌아보고, 아이를 보며 인간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확장해 나간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를 했다.

나는 육아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도, 훈육이 환장하게 어렵다는 것도 결국은 내 감정의 문제였다는 걸 깨닫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내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되자. 내가 성숙하게 감정을 다스리고, 주변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잘 대처하는 사람이 된 다면 아이들 또한 잘 보고 배울 것이라고.

일단 나부터 진짜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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