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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May 07. 2024

"좋은 엄마"라는 단어의 잘못된 해석.

내 안의 감정 읽기

친정 엄마를 모시고 식사를 마친 뒤 근방에 주차장 있는 카페에 가기로 한 차 안.

정확한 목적지를 찾지 못했고 시간이 늦었으니 오다가 본 곳 중 붐비지 않고 차 델 데가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

어른은 어른대로 목적지를 찾느라 바쁜데

아이 둘이 동시에 나에게 뭐라 뭐라 말을 했다.

한 녀석이 시작하니 지지 않으려는 듯 먼저 대답해 달라며 서로 보채기 시작했다.

좁고 소리가 웅웅 울리는 차 안.

목적지가 정확하지 않아 예민해진 운전자인 남편도

괜히 카페에 가자고 했나 미안해진 친정 엄마도

많은 결정과 답을 해야 하는 나도 다 정신없는 상황.

나는 아이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조용히 해! 일단 엄마는 목적지 찾아야 하니까 다 찾고 차가 멈추면 말해."

아이들은 몇 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무시하며 반응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엄마의 단호함을 깨닫고 차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요즘 들어 계속 어렴풋이 생각했던 내 생각이 맞았구나 하고 또 한 번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전의 나는 아이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 여기저기 답하고 휘둘리며 정신없다가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폭발하고야 마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이게 우리 집에 분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오늘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맞는 답을 찾은 씁쓸한 느낌이었다.

이제껏 아이의 요구를 당장 들어주는 것이 좋은 엄마이고 제대로 된 엄마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가 하나이다가 둘이 되고, 작은 요구가 큰 요구가 되면서 내가 모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참고 참고 또 참다 결국 핵폭탄만큼 폭발해버리고 마는 끔찍한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나는 왜 아이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내 안에 '좋은 엄마'란 것을 잘못 해석한 데서 나온 오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나는 가난해서 부부가 다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바빴고 소소하게 일상을 나누거나 여행을 하며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는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나는 그런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전업주부 겸 작가로 살며 아이의 공개수업, 관련 교육, 부모 참여 행사에는 빠진 적이 없다는 게 아이들에게 떳떳하고 뭔가 묘한 자랑스러움을 갖게 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엄마=다 해주는 것. 이란 해석을 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화가 나서 무섭게 변해 아이들을 몰아붙일 때는 악마 같고 짜증도 많은 엄마이지만 기본적으로 그게 깔려있어 나는 육아가 즐겁지 않았던 것 같다.

참고 참아내는 인고의 과정이 육아라고 생각했으니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행복보다는 고행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겠지.


이렇다 보니 어느새 아이들에게 확실한 가이드라인을 세워주지 못하고 이랬다 저랬다 혼란을 주는 방향만 제시하는 부모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스스로가 단단하게

확실한 삶의, 육아의 철학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데 갈대처럼 흔들리는 기준을 가지고 가르치려 드니 공감과 존경을 받지 못할 수밖에.

나는 역시 오늘도 내가 참 부족한 사람이구나. 깨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겨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시고 짧은 담소를 나누고 집에 오니 첫째가 또 징징대기 시작했다.

내 고장의 옛이야기에 대한 네 컷 만화 만들기.라는 제법 어려운 주제의 숙제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 대한 것을 유튜브로 보면서 만화로 만들 이야기를 선정하라고 했는데 잠 온다고 징징. 어렵다고 징징. 이해 안 된다고 징징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짜증과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걸 지켜보다 나는 말했다.

"네가 어렵고 하기 싫은 거 알겠지만 그렇게 화내고 짜증내면 내가 도와줄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안방으로 들어와 잘 준비를 마쳤다.

십분 정도가 흐르고 아이는 유튜브를 보던 핸드폰을 내게 내밀고는 말했다.

"수요일 까지니까 내일 마저 보고 결정할게. 지금은 씻고 자야겠어."

나는 그러라 했다.

예전이었다면 또 아이에게 휘둘리며 같이 짜증 내면서도 숙제를 끝까지 봐주고 있었겠지.

하지만 단호해지자 아이는 오히려 납득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을 했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아이들한테 잘해줘야지.

아이들이 바라는 걸 다 해줘야지.

그게 좋은 엄마라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렇다고 성격상 끝까지 받아주지도 못하고 시늉만 하는 주제에.

이 악순환과 아이들의 짜증은 결국 또 내가 어설퍼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몸이 버거워하면서도 당연하게 가족들 먹은 그릇, 널브러놓은 간식 봉지들을 치우곤 했는데 그것 역시 다 해주는 게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저녁에 아이 신발주머니를 빨고 아이에게 베란다에 널도록 시켰다.

아이는 싫다며 거부했지만 네 것이니까. 해.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스스로 하게 만들었다.

이제 하나씩 내가 잘못 해석한 '좋은 엄마'에 대한 프레임을 깨어볼 생각이 든다.

내 몸 버거울 때까지 희생해 키우는 것이 아닌 부모에게서 확실한 규칙과 규율을 배워 사회 속에서 잘 자리 잡게 하는 것.

오은영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육아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자립'이라고.

좋은 엄마가 되려는 욕심으로 버겁고 힘든 것을 꾸역꾸역 감내하는 것보단 아이들이 스스로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버텨주는 것이 진정한 값진 육아라는 결론을 이제야 내다니!

부족하고 아쉽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나는 또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여보기로 한다.

오늘보다는 내일 더 나은 부모가 되기를.

기록을 남기며 다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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