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를 모시고 아이 둘과 함께 경치 좋은 카페에 갔다. 몇 주를 달고 사는 감기에 몸이 피로했고, 전날 씻기 싫어서 아이 둘과 실랑이하다 밤 10시 넘어서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시켜 버렸다. 아이들도 울고 나도 울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육아는 또 이렇게 나를 최악의 인간으로 끌어내려 버린다. 마치 정신 차리고 살라는 듯 주기적으로 나의 한계와 최악의 면모를 보여주고 마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의 아이들이 내 밑에서 어떻게 자라야 하는 걸까.
나는 무수한 고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은 서울 마라톤에 가서 부재한 일요일 아침이 밝아 왔다.
사실 몸도 마음도 갈 여력이 안 되었지만 오늘만 기다리고 있는 친정엄마를 실망시킬 수가 없어서 강행한 카페 투어.
여유가 없어서인지 아이들 놀거리를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출발한 나를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경치 좋은 잔디에 뛰놀면 되겠지 라는 생각은 산 중턱에 위치한 카페의 세찬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 아이스크림과 빵으로 적당히 배를 채운 아이들은 놀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 가 본 카페. 루프탑과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지만 초여름 같던 어제 날씨와 달리 추워서 무용지물이었다. 특히 10살인 첫째 아이는 친구가 같이 놀자고 연락 왔는데 언제 집에 가냐고 수시로 물어댔다.
추운데도 잔디에서 뛰놀던 둘째마저 흥미가 떨어지자 아이들은 go back home을 외쳤다.
비싼 커피값에, 기름값 쓰고 와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나는 정신과 몸 에너지까지 다 쏟아부은 나들이가 이다지도 실속이 없는 것인지 허탈했다.
친정엄마는 밥이라도 먹고 가자고 했지만 이미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 집에 태워다 드리겠다고 완곡한 거절을 비추었다. 원래 우리 집에서는 왔다 갔다 하기 가까운 위치인데 친정엄마 집을 가려니 차는 또 어찌나 막히던지. 가는 내내 지겹다는 아이들 원성에 나는 이 외출의 수혜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째 아이는 친구집에 간다 해서 내려주고 둘째 아이는 뒷좌석에 잠들어 있었다. 나는 푹 못 잔 채로 또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아 운전석에서 핸드폰을 쥐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노무 집. 가자고 난리 치던 녀석들을 생각했다.
집이 뭐 그리 좋다고 계속 가자는 건지. 익숙해서? 놀거리가 있으니까?
그런 이유를 찾다 문득 내 어린 시절 내게 '집'을 떠올렸다.
12평 남짓의 임대 아파트.
고3 때 엄마아빠가 이혼하기 전부터도 낮시간에 집에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 아빠는 일하느라 바빴고 고등학생인 언니 역시 학교에서 늦게 왔다. 그 작은 집은 외로움으로 기억되어 있다. 12평이라 집은 좁은데 네 사람은 각자가 코너에 최대한 끝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
사이가 안 좋은 엄마, 아빠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소통의 부재. 관계의 부재.
그나마 집에서 자주 얘기하고 공유하던 언니마저도 스무 살이 되자마자 서울로 가자 나는 더욱 외로워졌었다.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놀며 집은 나에게 더 이상 안락함을 주고 재미를 주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20대 때 그렇게 집에 들어앉아 있지 못하고 나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의 나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하다. 집이란 편안하고 내 속을 보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집이 오히려 불편하고 눈치 보이고 낯설게만 느껴졌다.
집이란 그런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정리되지 않고 난장판인 우리 집을 보니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들에게도 집이 그러면 어쩌나.
늘 지저분하고, 날 선 말들이 오가서 집에 와서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집.
집은 어떤 공간이어야 할까.
나는 아직도 그 말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것 같은 정서는 주지 말자는 것은 명확했다. 집이 조금 편하고, 안락하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집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