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운전 중 잠이 올 때, 내가 책을 읽어주었다.
부부사이에 침묵은 금이 아니라 돌덩이다. 돌덩이는 아스팔트가 아닌 곳에는 어디든 존재하는 자연물이다. 때로는 집 짓는 머릿돌로 유용하게 쓰이기도 하고, 흉기가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은 머릿돌도 아니고 흉기도 아닌, 없는 듯 존재하는 물질이다.
우리 부부에게 침묵은 머릿돌도 아니고, 흉기도 아니지만, 서로에게 없는 듯 존재하는 시간이다. 평소에 남편과 차를 타고 어디를 이동하면 각자 앞만 보고 간다. 남편이 운전할 때는 주로 차량 라디오를 켜고 이동했다. 아이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면 주로 아이들과 나의 수다 소리뿐이다. 남편은 거의 택시기사처럼 운전만 한다.
내가 어쩌다가 말을 걸면 응, 아니 이 두 마디가 답인 경우가 많다. 서술형으로 대답해야할 질문을 해도 단답형으로 대답한다. 결혼 초에는 그런 걸 별로 못 느꼈는데, 아이들이 서너 살 무렵부터 취미생활을 하면서 집에서 나와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다보니 거의 말을 안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런 남편에게 적응되어 왔지만 침묵이 흐르는 시간에는 여전히 꽉 끼는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하면서 회색빛 거리를 걷는 기분을 종종 느꼈다.
택시를 탄 느낌의 차 안에서 명절에 고향이라도 가게 되면 두 서너 시간을 나는 아이들과 얘기하거나 잠을 잔다. 잠을 자다가 깨다가 하면서 운전만 하는 남편에게 가끔씩 마시거나 먹을 걸 주기도 한다. 나의 기분이나 느낌과는 달리, 남편은 그런 침묵의 시간이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특별히 답답하거나 심심하지도 않은, 무심하게 바라보는 텔레비전처럼 평범한 일상의 시간이란다.
“우와! 엄마는 책을 읽어주고, 아빠는 들으면서 운전하니까 아주 지적인 분위기예요. 좋아 좋아.”
큰 딸이 뒤에 앉아서 우리의 신기한 모습을 보며 응원해 주고 있었다.
남편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작년 10월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읽던 책을 연휴에 읽을 거라고 가져오면서 차에 두었다. 고명환작가의 유튜브를 통해 '고전이 답했다. 마땅히 살아야할 삶에 대해'를 알게 되어 내게 주문을 부탁한 책이다. 운전한 지 얼마쯤 지났을까? 내가 졸다가 깨어나니 남편이 잠이 온다고 했다. 가까운 휴게소에 들르면 내가 운전하겠다고 하니까 괜찮다고 했다.
남편의 잠을 깨우기 위해 운전석 옆에 놓여있던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기 시작했다.
운전하면서도 잘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책을 읽었다. 어떤 문장은 한 번 더 읽으면서 그 문장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하기도 했다. 또는 남편에게 질문도 했다. 평소에는 단답형 대답만 하던 사람이 그 책 내용이 얼마나 괜찮은지, 저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책의 감동을 진심으로 얘기했다. 자기 계발서였는데 일상에서 자신이 실천할 것도 얘기했다. 남편은 그동안 책을 읽고 그 정도로 주변에 책 내용의 감동을 얘기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말을 줄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동안 입을 닫았던건 내게도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늘 내 주장이 강하다고 했는데, 아마도 말로써 나를 이길수가 없으니, 아예 나와의 대화를 포기한 건 아닐까?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모두 남편에게만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책 내용에 귀를 기울여 집중하고, 내 질문에 대답하면서 졸음이 가셨다고 했다. 도로 정체가 조금 있었지만 휴게소에 들리지 않고 바로 고향에 도착했다. 남편은 시댁, 친정에 가서도 짬짬이 책을 읽더니 연휴 기간에 한 권을 다 읽었다. 다 읽은 책을 딸들에게도 꼭 읽어보라며 권유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고 작가가 추천한 고전 리스트를 쭉 적어서 내게 도서관에서 빌려오라고 했다.
어제는 남편이 읽고 싶다는 책들을 빌려서 남편에게 주었더니, 저녁에 바로 데미안을 읽기 시작했다. 남편이 책을 읽고 알을 깨려고 하고 있다.
남편은 특히 책에서 '새해에 뭔가를 결심하고 계획을 세우는데, 계획을 세우는 시간에 무조건 실천을 하라. 일기를 쓰기로 했다면 일기장을 구입하기 전에 바로 아무 종이에나 일기를 먼저 쓰라.' 그 부분이 상당히 공감된다고 했다. 보통 계획을 세우고, 작심삼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또 고 작가의 긍정 마인드와 이타심을 보면서 깊게 공감한다고 했다.
책을 읽으면서 글자가 눈으로 머리로 들어와 가슴까지 들어간 것 같았다. 이제 가슴이 진한 감동으로 채워지면 발까지 내려가리라.
이렇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인데, 그동안 집안의 해결해야 되는 문제들, 너무 건조한 질문들만 해 온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퇴근한 남편이 집에서 만이라도 온전한 휴식을 취하고 싶었는데, 아내로부터 숙제 같은 질문을 받았기에 단답형 대답만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또는 남편의 기를 살려주는 얘기보다 늘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편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재단했던 말들에서 남편의 생각을 막고, 말을 막았을지도 몰랐다. 남편의 특성을 이해하고 격려하고 응원하기보다, 왜 빨리 가지 않냐고 닦달해 왔다. 내 눈의 들보(나의 큰 잘못)가 다시금 보인다. 그동안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 늘 남편 눈의 티끌만 보고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자신을 알아차리기도 했지만, 그 깨우침은 다시 깨어졌다. 다시 깨우치고 깨어지기를 반복한 것 같다.
이번 설날 고속도로 차 안에서는 침묵의 돌덩이가 아니라, 책을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와 남편의 도란도란 말소리는 우리 부부에게 금이 되었다. 요즘 금값이 많이 올랐는데, 우리 부부의 대화는 진짜 금값이었다.
2025년 2월 4일. 오늘이 실제 결혼 기념일이다. 긴 겨울같았던 시간들이 남편의 독서로 인해 이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봄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 계절은 아직 겨울이지만 우리부부의 가슴에는 이미 봄이 왔다. 독서의 힘은 돌덩이를 금덩이로 바꾸는 연금술이었다. 중년에도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것. 남편이 바뀌니 나의 태도도 자연스럽게 호응해주었다. 아무리 내가 심리상담을 받고 부부코칭을 받아도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독서를 통해 해소될수도 있다는 걸 남편이 증명해주었다.
앞으로도 남편은 책을 읽을 것이거, 나도 함께 읽을 것이다. 그래서 공적으로 건조한 질문이 아닌, 봄날에 활짝핀 야생화같은 기분좋은 질문을 할 것이다. 남편은 야생화의 향기를 맡으며 그가 가진 배경지식들을 줄줄이 내게 말을 할 것이다. 멍석을 깔아놓으니 그토록 말을 잘 하는 남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