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보다 tv내용이 더 중요했던 남편의 환골탈태
아이들이 초등학생이었을때만 해도 우리 집 거실 풍경은 독서실 같았다. 나의 재산이 책이었고, 집에서 독서논술 공부방을 했기 때문에 거실 한쪽면이 커다란 책장 3개가 차지하고 있었다. 3분의2는 아동청소년도서, 3분의 1은 내 책이었다. 남편은 남의 집 책장인 양 그 많은 책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쩌다 집에 빨리 들어온 날은 컴퓨터와 TV가 더 가까웠다. 아이들은 초중학교 때 아동도서들도 많이 있었지만 '책이 너무 많으니' 오히려 책을 안 읽는 면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그런대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컴퓨터와 휴대폰의 디지털 세계에 빠지면서 책을 멀리했다.
2024년도에 사교육업을 정리하면서 현재의 우리 집 거실은 평범하다. 거실 앞쪽 벽면은 tv가 놓여있는 장식장이 있고, 앞에는 소파가 차지하고 있다. 소파 옆에는 골프연습용 채가 세워져 있다. 거실 한편에 컴퓨터용책상과 책장 1개가 있을 뿐이다. 남편이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무조건 tv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운다. 온 영혼이 tv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어쩌다가 말을 하면 눈은 tv에 고정한 채 대답만 하거나, 내가 재차 질문하면 그제야 나를 쓰윽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tv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도 눈은 거실 tv를 향해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tv를 조금 꺼라고 하면
정색을 하고 약간 짜증나는 듯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들었다. 그게 아니면 휴대폰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거의 tv와 휴대폰 중독이었다. 봄 여름에는 야구시즌이라고 온몸과 영혼이 모두 tv에 들어가 있었다.
남편은 식탁에서 저녁을 먹은 후 바로 소파로 간다.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면, tv 끄기는 내 몫이었다. 처음에는 으레 그러려니 했는데, 매번, 몇 년을 지속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포기했다. 아무리 tv 꺼고 자라고 해도 안되고, 잠이 오기 전에 침실로 가라고 얘기해도 소용없었다. 남편에게 항의하듯 tv 혼자 떠들어도 그대로 두기도 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으로 30분 후 꺼지도록 설정을 해 놓고 보았다. tv와 일심동체로 보였다.
그랬던 남편이었다. 책을 읽은 후에는 식탁에서 책상으로 간다. 눈도 침침해져 가는 시점에 책에 재미를 붙이면서 거실을 작은 독서실로 꾸몄다. 그냥 2인용 책상 한 개 놓은 것 뿐이지만, 거실 풍경이 확 바뀌다보니 거의 독서실 같았다. 작년에는 한강 책을 다 보더니, 이번에는 고명환 책을 한 권씩 읽기 시작했다. 고 작가 책에 나오는 고전 리스트를 적어서 내게 빌려오라고 했다. 책을 한 권씩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핸드폰으로 단어를 검색하면서 읽어갔다.
지금 우리 집 거실은 거실 창가에 2인용 책상을 두었다. 남편과 나란히 앉아 책을 읽는다.
저녁에는 아늑한 분위기를 위해 천장에 조명도 새로 달고 커튼도 새로 교체했다.
책상에는 독서용 스탠드도 마련했다. 독서대에서 편안하게 책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흐뭇하다는 단어는 이럴 때 써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마을 도서관의 책이 우리 집 책처럼
항상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다.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다 보니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을
잊어먹을 때도 있었다. 내가 책을 보고 있으니, 심심했던 아이들은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엄마표 한글을 둘 다 네 살무렵에는 다 떼다보니 일찍부터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파 앞에는 역시 1~2인용 독서 책상을 놓아두었다. 소파에는 등받이 의자를 두어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안방에도 내 책상이 있지만 굳이 거실에서 읽는 건
가족이 함께 책을 읽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큰 딸은 자기 방에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거실 tv는 이제 검은색 물체로만 존재하고 있다. 거실 창가 책상에서 책을 읽던 딸이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남편 옆에 앉아 함께 책을 읽었다. 데미안을 읽고 있었다. 조금 어렵다고 해서 지금 어떤 장면인지
물어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대로 신나게 설명을 해 주니, 남편은 알았다며 이제 책 읽는데 집중하겠단다.
남편이 처음으로 한강 책을 읽을 때만 해도 한 두 권 읽고 말겠지 생각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뀐다는 말은 남편을 두고 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 이제야 서서히 이루어지려는 걸까? 올해부터는 술도 주 1 회만 마시겠다고 스스로가 다짐도 했다. 그 다짐이 아직은 지켜지고 있다.
남편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에게도 권유를 하니 아이들도 다시 책을 읽으려고 했다. 한 권의 책을 4명이 다 돌려 읽고, 셋째 주 주말 저녁에는 독서토의를 하기로 했다. 가족이 다 같이 책을 읽고 독서 토의를 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설렌다. 남편이 tv를 끄고 책을 펼치면서 우리 집 거실은 가정 독서실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