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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노벨문학상]의 [남편]기적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결혼 30년 만에 처음 책을 읽은 남편

by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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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결혼 30년 만에 집에서 처음 책을 읽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0년째다. 평소 남편은 퇴근 이후나 주말에 어쩌다가 집에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눈과 귀와 영혼은 TV와 휴대폰 안에 들어가 있었다. 서 있을 때는 골프연습용 작대기를 휘두르곤 했다. 우리 집 푸들이 실수로 맞기도 했다.

소파에 드러누워 있을 때 1시간이 넘어가면 어느새 익숙한 오토바이 숨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몸속에 남아 있는 알코올이 간에서 분해하느라 쉬어주라고 몸이 명령하기 때문이다. 밤새 코골이와 수면무호흡 증상으로 깊은 잠을 못 자니까 몸이 알아서 쉬어주는 차원도 있다.


2024년 10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인터넷을 도배한 다음 날, 남편은 우리 집에 한강 책이 없냐고 물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가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빌려주면서 사라졌다. 책을 빌려주었다는 게 그때만큼 아쉬웠던 적은 없었다.


사교육업을 정리하면서 내 책의 90% 정도는 다 나눠주었다. 책은 나의 재산이었고, 일이었고, 일상이었다. 지사 사무실과 집 거실 벽, 안방 한쪽에도 책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몇 번의 이사와 책장에 책이 넘쳐나면서 주변에 주거나 기증한 책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다. 책을 한 번 읽은 후, 재독한 책은 거의 없다. 남편과 아이들은 내 책에 관심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독서논술 지사사무실을 폐업하면서 그 많은 책을 다시 집으로 가져온다한들, 이제는 둘곳도 마땅찮았다. 그래서 적어도 한 번은 더 읽고 싶은 책과 소장하고 싶은 책들을 책꽂이 하나 정도 분량만 가져왔다.


남편은 내게 웬만한 책은 있겠거니 생각하며 내게 물은 것이다. 책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 남편이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이 탄생했는데, 그 책은 읽고 싶단다. 우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벅찬 감격이었다면, 남편이 책을 읽고 싶다는 얘기는 놀라움과 신기함이었다. 수상 소식을 접한 당일 이미 내게 한강 책이 없어졌다는 걸 알고 인터넷에 한강 책 3권을 주문해 놓은 상태였다. 일주일이나 그 이상 걸린다고 했다. 맨 먼저 도착한 책이 「소년이 온다」였다.


남편의 독서로 우리 집 거실이 조용해졌다. 평소에는 늘 TV소리가 소음처럼 소란스러웠다. TV를 안 보는 사람은 시끄럽게 느껴진다. 남편은 책을 읽으며 가끔씩 눈이 침침하다고 하면서도 아직은 돋보기를 써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동호에 대해, 어떤 장면에 대해 내게 묻기도 했다. 마치 학생이 책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은 부분에 내게 질문하듯이. 화자가 바뀌면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게 좀 헷갈리는 것 같았다.


독서의 재미에 물들어가는 최근에는 딸에게도 「소년이 온다」를 추천하며, "책이 조금 어려우니까 엄마의 블로그 글을 참고하면 된다."고 했다. 내 블로그 글을 단톡에 올렸더니 봤던 모양이다.


남편은 알코올이 50대 후반까지 간과 뇌를 지배했으니 문해력과 기억력이 조금씩 둔화되고 있었다. 한 번씩 남편에게 유용하겠다 싶은 책을 읽으라고 주었지만 몇 번 쓰윽 훑어보고는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퇴근 후 책을 읽는 모습이 기특해서 독서책상을 소파 앞에 갖다 놓았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사무용 책상을 딸에게 주고, 딸에게 있던 독서책상을 남편에게 준 것이다. 설 연휴 전, 거실을 아늑한 가족 독서실로 꾸몄다. (연재 중에 자세하게 씁니다.)


「소년이 온다」를 일주일에 걸쳐 다 읽더니, 이제는 또 한강의 다른 책을 달란다. 약간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단다. 그래서 이번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주었다. 이 책 역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어서 독서논술 교사였던 내게 간간이 질문을 했다. 나는 집안일을 하다 말고 남편에게 다가가 기분 좋게 설명해 주었다. 남편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소감은 어때?"

이런 질문을 하니

"뭘 그런 걸 물어보나?"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남편에게는 너무 막연한 질문이었다. 내가 너무 서둘렀다. 책을 읽는 남편의 모습이 낯선 듯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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