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하기 전 남의 편은 취미생활, 온갖 모임이 삶의 낙
책을 읽는다는 건 평범한 일이다. 남편이 책을 읽는다는 사실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브런치에 연재까지 하나? 싶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독서를 하기 전의 남편 모습에서는 '신기한'일이기 때문이다.
남의편이었던 시절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는 건, 새삼스럽게 공개적으로 남편의 흉을 보기 위함은 아니다. 지금 독서를 하는 남편이 왜 '기적 같은 모습'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남편은 결혼 후 연년생 아이들이 서너 살 무렵부터 취미생활을 시작했다. 고향동문들의 일요일 조기축구회였다. 이런 취미를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에 축구를 하고 바로 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식사를 하고 술을 한 잔 한다. 가끔씩은 일찍 들어오면 오후 2시경, 자주 저녁 무렵에 들어왔다. 그 시간에 들어오면 축구를 하고 한 잔 했기 때문에 집에서는 잠을 잤다. 일요일에 아직 한창 예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없었다.
큰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아빠가 출근하는 것도 떨어지기 싫어서 울곤 했다. 그때만 해도 토요일에 정상근무를 하던 때여서, 공휴일이 아니면 아이와 하루종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평일에도 주 3일 정도는 술자리로 늦게 귀가했다.
연년생 딸들을 독박육아하며 아이 둘 다 기저귀를 차던 때에는 둘의 대변 기저귀를 일일이 삶았다. 매일 기저귀를 삶고 세탁기를 두 번 돌리던 시절이었다. 수도세가 아까워서 손으로 빨고 탈수만 하기도 했다. 시장을 갈 때는 유모차에 큰 아이를 태우고 작은 아이는 업었다. 시장 물건은 유모차 아래 공간에 넣고 다녔다.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곳에는 큰 아이 손을 잡고, 작은 아이는 업었다. 조금만 걸을 일이 있으면 아직 어린 큰 아이도 업어달라고 보챘다. 작은 아이를 업은 어깨에 분유 가방을 메고, 큰 아이를 안고 걸었다. 말 그대로 업고, 안고, 메고 걸었다. 요즘 젊은 부부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당시 내가 남편에게 축구가 끝나면 집으로 곧장 오라는 얘기를 수없이 했지만, 고향 선후배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는 게 더 좋은 것 같았다.
토요일이 휴일이 되면서 남편의 취미 하나가 더 늘었다. 낚시였다. 가끔씩은 토요일 아침에 낚시를 갔지만, 금요일 저녁부터 떠나는 날도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 낚시를 갔다가 토요일 낮에 들어오면 코를 골며 잠을 잔다. 밤새 낚시하느라 낮에는 자야 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에는 또 조기축구회를 갔다. 집으로 오면 피곤하니까 또 잤다. 축구회, 낚시 등을 하면서 교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주중에는 점점 늦게 귀가하는 날들이 많았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건, 참을 수 있었는데 한창 예쁜 나이의 아이들에게 아빠의 부재가 속상했다.
조기축구회 회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휴일을 보내면서, 남편들의 흉을 보곤 했다.
밖으로만 도는 남편에게 진지하게 얘기했다.
"내가 그렇게 싫어?"
"아니, 그냥 취미생활하는 게 좋아서. ㅇㅇ의 아내는 천사 같아. 아무리 취미생활을 해도 잔소리를 안 하는데.
네가 잔소리를 하니까, 너무 듣기 싫고 짜증 나."
혹자는 남편이 밖으로만 돌 때는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평범한 외모에 가정에 충실한 편이다. 우리 집에 비데를 갈아주러 온 직원이 얘기했다. 일 때문에 약속 잡기가 늘 힘든 나를 보면서
"바쁘게 사는 집 치고, 아이들과 함께 사용하는 화장실이 정말 깨끗하네요."
큰 아이가 아직 한글을 모를 때부터 마을 도서관에 다녔다. 작은 아이를 업고, 큰 아이는 유모차에 태우고, 빌린 책들은 유모차 아래 공간에 넣고 다녔다. 집에서 마을 도서관까지 거리도 유모차를 밀고 다니기에는 멀었다.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우유팩과 노벨과 개미라는 학습지를 활용하여 아이들 한글을 일찍 뗐다. 영어도 아이들이 놀면서 익혔다.
아이들이 대여섯 살 무렵부터는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운동 차원으로 등산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집 뒷산을 올라갔다. 작은 아이를 업고, 큰 아이는 걸어서 올라갔다.
"새댁이 아이를 업고 등산을 하네. 아유 힘들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큰 아이는 그래도 잘 따라왔다. 일요일에도 가끔씩 등산을 하곤 했는데, 남편은 바다에 낚시하러 갔고, 나는 아이들과 산에 있는 꼴이었다. 어느 날 작은 아이가 말했다.
"엄마, 우리는 왜 아빠하고 안 놀아?"
아이에게 상황 설명을 하는 것 자체가 마음 아팠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나도 어리석었다. 그저 잔소리처럼 남편에게 말을 할 게 아니라, 취미나 결혼 생활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어야 했다. 어린아이 둘을 혼자 키울 자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결판을 내듯 뭔가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그게 후회스럽고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어차피 잔소리를 해도 바뀌지 않았으니, 차라리 실컷 취미생활을 하라고 놔둘걸. 그러면 적어도 부부사이가 악화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다.
축구와 낚시를 한 참 다니더니, 직장 내에서 또 볼링도 치러 다녔다. 낚시가 시들해지자 이제는 약초산행을 시작했다. 약초를 캐는 사람과 이산 저산을 다녔다. 축구와 낚시, 약초산행을 10년 넘게 할 무렵, 고향 동창들이 대부분 골프를 치고 있었다. 취미생활뿐 아니라, 온갖 모임으로 평일이나 휴일에도 바빴다. 초등동창, 중등동창, 축구회 모임, 낚시동호회 모임, 경조사 다니기로 집에서 얼굴 보며 제대로 대화를 해 본 기억이 없다.
내가 다음 주 일요일이나 이번 주에 뭘 하자고 하면 늘 이미 모임이나 약속이 잡혀 있었다. 어느 날은 너무 기운도 없고, 마음도 우울해서 외식을 하자고 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전화가 왔는데, 안된다고 했는데도 세 번이나 전화가 와서, 결국 그 사람과 약속 장소로 나갔다. 아내보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더 중요했다.
나는 작은 아이가 네 살 무렵부터 프리랜서 기자일을 시작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집에서 독서논술 공부방을 시작했다. 그 일 역시 아이들을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고향 동창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골프를 시작하면서 축구와 낚시 약초 산행은 졸업을 했다. 골프를 치기 위해 골프연습장, 스크린에 다니느라 또 바빴다. 골프모임이 네 개가 되었다. 그 정도로 취미생활을 하려면 경제적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나이대 평균 연봉이거나 적거나 수준이다. 내가 독서논술 공부방을 하면서 버는 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내게는 2차 세계대전을 겪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신앙생활과 심리 공부를 하며 버텨냈다. 나는 수 십 년간 만성 질환을 앓으면서도 검사와 약복용으로 정상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골프는 제대로 운동이 안 된다며 이제는 산악회를 가입해서 전국의 산을 다녔다. 골프모임은 골프대로 산악회는 산악회대로 다녔다. 30여 년간 집은 하숙집이었다. 남편은 자주 내게 말했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산다."
그 남들이라는 건 '남편 주변 지인'들을 가리킨다. 지인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내 눈에는 '남편 지인들'만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똑같은 공간에 살고 있어도 세상을 보는 눈은 이렇게 차이가 났다. 남편은 화성에서 살고 나는 지구에서 살았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이 쏘아올린 공이 화성까지 날아올랐다. 화성에 있던 사람이
'이게 무슨 공이야?'라며 공을 잡았다.
남편이 독서라는 공을 잡고 지구로 귀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