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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동굴 문이 열리다

아빠가 책을 읽는 모습에 딸들도 감동

by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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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책을 읽기 전까지, 우리 집에는 그동안 4개의 동굴이 있었다. 4명이 각자의 동굴에서 살며 식탁에서 어쩌다 4명이 같이 밥을 먹었다. 식사 후에는 각자의 동굴문을 닫고 살았다. 그 동굴문을 드나드는 시간도 각각 달랐다. 남편은 어쩌다 일찍 귀가했고, 작은 딸은 학교 다니며 아르바이트 등으로 귀가시간이 불규칙했다. 큰 딸은 3교대 근무로 귀가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나는 고등수업이나 지사 업무로 가끔씩 늦게 귀가했다.


어쩌다 일찍 온 남편은 거실에서 TV나 핸드폰 속에 들어가 있었고, 큰 딸은 직장인이지만 여전히 수험생처럼 자신의 방에서 업무 공부하기 바빴다. 작은 딸은 어쩌다 집에 일찍 오면 늘 책상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안방 책상에서 이것저것 하느라, 4명이 각자의 동굴에서 살았다. 일단 거실의 TV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방문을 닫아야 했는데, 푸들이 이방 저방을 오갈 때 문을 열어줄 뿐이었다.


아이들을 양육할 때 아빠 자리는 거의 비어있었다. 아빠로서 딸들에게 어떤 훈육이나 가르침 같은 것도 없었다. 혼자서 사춘기 아이들과 씨름하면서 거센 물살의 강을 건너듯 힘겹게 양육의 강을 건넜다. 어쩌다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얘기를 할 때도 있었는데 어떤 권위나 신뢰감이 없었다. 아이들에게 얘기하면 수용보다는 반발이 더 많았다.


남편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식탁에서 아이들에게 아빠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요즘 아빠가 반성을 많이 하고 있다. 그 책 꼭 읽어봐라. 인생에 도움 되는 내용이 많더라."

이제 성인이 된 딸들에게 한창 양육할 시기의 아이들을 대하듯 얘기했다. 식탁에서도 핸드폰을 보며 밥을 먹는 딸에게

"OO 이는 핸드폰 중독인 것 같은데, 핸드폰보다는 책을 보는 게 어때?"

"아빠가 TV볼 때는 얼마나 시끄러웠는데......"


그러면서도 딸들은 이제 아빠나 내 얘기에 반발하지 않고, 수용하고 있다. 물론 이제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것도 있지만 적어도 아빠의 변화에 딸들도 무언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큰 딸도 틈날 때 휴대폰만 보더니, 이제는

약간 숙제처럼 책도 읽는다. 작은 딸도 시간 날 때마다 그 책을 읽으려고 하고 있다.


남편이 책을 읽은 이후로는 4명 모두 저녁식사를 같이 할 때가 많다. 식탁에서 최소한의 소통을 시작했다.

4개의 동굴문이 열린 것이다. 거실이 조용해지자 방문을 닫을 필요가 없었다. 딸들은 식사 후에 늘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기 바빴는데, 우아한? 조명의 거실 독서책상에서 아빠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서 딸들도 어쩌다 독서책상에 함께 앉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도 보지 못한 신기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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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2월에만 해도 책을 12권을 읽었다. 본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란다. 내가 생각해도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책을 읽을수록 계속 읽고 싶다고 했다. 도서관 대여 날짜를 맞추기 위해 산에 맨발 걷기를 가서 잠깐 쉬는 시간에도 책을 본다.


늘 남편에게 지적과 잔소리만 하던 내가 남편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남편도 더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다. 독서의 흥미에다 내 칭찬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같았다.

그동안은 서로가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남편의 도를 넘어선 취미활동이나 모임은 나의 잔소리를 불러일으켰고, 그 잔소리로 인해 더 나와 관계가 멀어져 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남편에 대한 인내는 거의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 간척사업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제는 그 땅을 고르는 작업을 해야 하는 단계인 것 같다.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고, 칭찬과 격려로서 힘을 북돋워주는 것이다.


이제 가장으로서 남편의 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딸들이 움직이고, 나의 남편에 대한 언어가 긍정으로 바뀌어간다. 책을 안 읽은 사람이 책을 읽은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책을 읽은 사람은 책을 안 읽은 사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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