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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부부에게 독서로 해빙기 도래

말투에는 그 사람의 역사가 묻어있다.

by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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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왕초보 가족들이 어설픈 독서토론회를 한 이후, 아이들도 휴대폰보다는 책의 세계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어젯밤에 작은 딸은 '독서와 무제한 친해지리'라는 앱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책을 읽겠다고 했다. 아빠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독서의 힘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남편의 태도가 변하면서 얼음 같았던 부부관계도 조금씩 녹고 있다. 부부의 해빙기가 어떻게 도래하고 있는지, 엊그제 일화를 소개한다.



우리가 30여 년 결혼 기간에 남편이 밖으로만 돌면서 하숙생 같은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내게는 큰 불만이 없다고 했다. 25년 동안 맞벌이를 하면서도 집안 살림도 알뜰살뜰하게 했고, 아이들에게도 정성을 다했다. 늘 책을 읽으며 성실하게 사는 모습에는 불만이 없단다. 다만 내 말투가 너무 딱딱거리고 명령조로 얘기하면서 자신에게 쏘아붙인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나의 말투가 내게 유일한 불만이었단다.


그러면서 25년간 업무상 전화로 대화할 때 그들에게는 상냥하게 말하는데, 그들에게 하듯이 자신에게도 상냥하게 말을 해달라고 했다.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나의 딱딱한 말투가 쉽게 고쳐지지는 않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투는 아니다. 강의할 때 분명한 발음과 전달력으로 강의력은 자주 인정받았다. 수업할 때도 목소리가 큰 편이었다. 밖에서 수업하는 내 목소리를 들을 때, 저렇게 목소리를 크게 내는데, 하루 종일 목이 괜찮나?라는 말까지 들었다. 평소에는 여성 목소리치고 약간은 저음톤이고 밝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런 내가 엊그제는 남편에게 나도 모르게 부드럽게 말을 한 것 같았다. 남편이 진심으로 고답다는 나의 감정이 말투에 묻어났기 때문이다. 말투는 그 사람의 현재 감정과 최근의 감정, 지난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요즘은 사교육업을 하지 않아서 목소리를 크게 낼 일도 없고. 딱히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는 상태다 보니 내 말투도 바뀌는 것 같다. 또한 남편과의 수십 년 얼음 같았던 갈등이 조금씩 녹고 있는 것도 한몫 했으리라.


엊그제 내가 약물 알레르기 검사를 위해 평일에 대학병원에 갈 때 보호자로 따라온 사람은 남편이었다.

병원에서는 만일의 위험한 사태에 대비해 반드시 보호자를 동행하라고 했다. 위험에 대비해 약물검사 최악에 대한 동의서도 쓰고, 간호사는 4시간 동안의 검사 내내 바로 내 옆에서 나의 약물 반응을 지켜보고 있고, 잠깐 자리를 비울 때면 다른 간호사가 내 옆에 있게 했다. 위험한 상황일 때를 대비해 링거를 꽂아놓은 상태로 문제가 발생하면 즉각 치료 약물을 투입하기 위해서다. 응급사태에 대비해 산호 호흡기 등도 비치되어 있다. 의사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언제든 호출이 가능한 상태였다.


다행히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상태로 내게 맞는 약물을 찾았다. 보통 아파서 병원에 가면 기본적으로 진통제나 항생제를 사용하는데, 나는 그것조차 함부로 먹을 수도 없는 체질이었다. 예전부터 그런 건 아니었고, 40대 후반 무렵부터 약물에 알레르기가 발생했다. 내 지갑, 휴대폰에는 부작용 약물 리스트 카드가 있다. 병원이나 약국에 갈 때 항상 지참하고 다닌다. 멀리 여행을 갈 때도 동행인들에게 항상 알린다.


약을 먹고 반응을 지켜보는 도중에 어떤 경우에도 걱정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약물 부작용으로 응급실에 갔던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약간 긴장을 했었다. 몸이 아팠을 때 부작용이 있는 약을 먹어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아프기 전에 내게 부작용이 없는 약물 검사를 한다는 것. 혹시나 부작용이 발생하면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 을 생각하니 그 상황이 감사했다.


그런 위험한 검사를 받는 동안 남편은 차 안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차로 걸어가는 동안, 남편의 장점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늘 남편의 단점만 보였다. 시댁식구들이나 남편 주변 사람들이 모두가 남편을 착하고 건강한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듯이 착하고 건강한 건 맞다. 다만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몰랐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병원에 나의 보호자로 따라온 사람이 남편이라는 것. 수 십 년간 한 집에 살면서도 각자 생활하며 서운함과 불만이 켜켜이 쌓였어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먼 곳까지 달려와주었던 사람이다.


차 안에서 책을 읽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에게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어색한 말보다는 덕과 체를 갖춘 사람이라며 칭찬을 해 주었다.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 생활비를 꼬박꼬박 주어서 그 자체로 감사할 일이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맞벌이를 하며 남편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 나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 나의 칭찬을 받은 남편이 식당에서는 나를 칭찬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게 참 멋있고 위대한 일이지."라고 했다. 그전에는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구나 그 정도로만 생각했단다. 그날 남편과 대화를 할 때의 내 말투는 부드러웠을 것이다. 서로가 고맙다는 말과 칭찬하는 말을 하면서 말투가 딱딱하게 나올 수가 없다. 말투에는 그때의 감정이 함께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남편에 대한 불만이 가슴속에 그대로 응축되어 나의 말투에 배어 나왔던 거다. 또한 사는 게 팍팍하면 말투도 거칠게 나올 수밖에 없다.


남편에게 딱딱하게 쏘아붙이며 했던 내 말투는 이제 부드럽게 고치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변해가는 중이다. 남편의 태도가 변하면서 불평불만이 많았던 내 감정이 호의적으로 녹기 때문이다. 남편이 수 십 년간 그토록 듣고 싶었던 다정한 말투가 이제야 나온다. 그동안은 자신의 태도 때문에 내 말투가 딱딱했다는 건 모르고, 오직 말투만 고치라고 하니 내 말투가 고쳐질 리가 없었다. 나의 쏘아붙이는 듯한 말투는 남편에게 짜증을 불러일으켰고, 그 짜증으로 나는 또다시 쏘아붙이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내가 부드러운 말투로 남편을 대하니까. 남편이 그런 내게 좋게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독서는 수 십 년간의 부부문제를 선순환으로 만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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