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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Sep 15. 2019

아폴로 눈병 1

합리주의자의 합리적인 일상

J는 규칙적인 생활을 추구한다. 그게 모두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얘를 들어 자는 시간만 봐도 그렇다. 어느 날은 밤 10시에 자고, 어떤 날은 새벽 3시에 자고, 또 다른 날은 아예 오후 7시쯤 잔다고 치자. 그가 평균 6시간 잔다는 것을 감안하면 취침시간에 따라 일어나는 시간도 달라진다. 그렇게 바이오리듬이 깨지면 그 스스로 쉽게 피로해질 것이다.


이는 금세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간다. 피로가 쌓이고 스트레스가 많아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옆의 사람들에게 짜증을 부리기 쉽다. 또 잠에서 깨면서 느끼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배달음식을 시키거나, 밖에 나가서 사 먹어야 하는데 이 역시 타인을 괴롭히는 일이다. 아무리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해도 중간 없이 찾아오는 손님을 좋아할까?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24시간 식당이 사라지는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경기가 어려워 돈이 안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식당들이 문을 닫는 진짜 이유는 피곤하기 때문이다. 잠을 못 자니 피곤하고, 그렇다고 사람을 쓰자니 돈을 그만큼 더 써야 해서 피곤하고, 어쨌든 장사가 안 되니 그것도 피곤하다. 결국 모든 건 피곤한 것으로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과 일관성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 비록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관계에서도 작게나마 예측이 가능하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불편함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래서 그의 생활에는 규칙이 있다. 그는 항상 자신 집 건너편, 아파트 바로 앞 4차선 도로 건너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장을 본다. 마트 출입문인 커다란 유리판에는 노란색 비닐로 '수퍼마켇'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주인이 혹은 디자이너가 노란색을 선택한 건 실수였다. 하루 종일 밖을 내다보며 강한 햇빛과 거센 폭풍우에 맞서는 바람에 비닐의 노란색은 점차 말라비틀어져 하얗고 거무틔틔해진 살구 껍질 색과 닮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원래 흰색이었는데 노랗게 변색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였다. 더군다나 출입문 모서리마다 검은 먼지뭉치인지 기름때인지 곰팡이인지 모를 뭔가가 뒤덮여 있었다. 이러한 외관 때문에 최소 10년은 이 자리에 있었던 거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제로는 3년밖에 안됐다.



출입문에 붙은 안내를 보면 수퍼마켇은 평일 저녁 10시 50분, 주말은 저녁 9시에 문을 닫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25분 정도 늦게 셔터를 내린다. 이 수퍼마켇의 소수 정예 격인 단골들 중 한 명인 J가 매일 마감시간 직전에 오기 때문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문 닫는 시간보다 10분 일찍 가게에 들어선다. 솔직히 매일 그랬다는 건 약간의 과장을 보탠 거지만, 실제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가장 어긋난 던 게 2년 전 J가 아폴로 눈병에 걸려 외출을 삼가야 하나 고민하면서 3분 늦었던 날이었다.


전염성이 강한 눈병에 걸린 그가 타인과 접촉한다는 건 모든 이의 불편함을 최소화한다는 그의 규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추론이다. 물론 그도 같은 고민을 했기 때문에 늦었던 거였지만, 그는 더 앞을 내다봤다. 만약 그가 마켇에 가지 않는다면 가게 주인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저 전염성이 강한 눈병에 걸린 것뿐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마켇주인은 그가 심장마비로 쓰러진 건 아닌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같은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겪으며 너무나 큰 상심을 겪는 건 아니지 오해할 수도 있다. 계량 공리주의자스러운 그는 마켇주인이 겪을 수 있는 이 같은 심적 압박이 눈병에 걸릴 수 있다는 걱정보다 훨씬 크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행여나 마켇주인이 불안함을 못 이겨 119나 경찰에 신고한다면 불편함은 눈사태처럼 온 동네를 뒤덮어 버릴 것이다. 전염이 쉽게 되는 아폴로 눈병의 이름을 따 '아폴로성 불편함 전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아무리 강력한 전염성을 가진 눈병에 걸렸어도 마켇에 가는 것이 맞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장갑을 끼고 안대를 하면서 접촉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또 미리 이야기를 해서 마켇주인이 더 주의를 기울이게 하면 되니까. 참으로 J다운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지금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J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이날도 10시 40분께 마켇 출입문을 열었다. 한 가지만 더 보태자면 마감시간 직전에 가는 것도 가게 주인 입장에선 피곤한 일 아닌지, 즉 이제 곧 다가올 편안한 휴식에 대한 기대를 마른 바게트 부러뜨리듯 깨트리는 것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그의 주장은 어쨌든 마감 때까지 가게에 있다고 전제하면 10분 일찍 가는 건 주인 입장에서 문제 될 게 없다, 왜냐면 가게 주인은 어차피 거기 있을 거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손님이 더 안 오려나 하는 찰나에 자기가 들어서면서 아직 더 돈을 벌 수 있다는, 마치 공돈을 주운 것과 같은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규칙성을 갖게 된다면 마켇주인에게 그의 방문은 마치 때 되면 들어오는 이자와 같은 즐거움이 된다고 여겼다. 그는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추가 수익인 것이다. 좀 더 덧붙이자면 사람이 붐빌 때 겪는 사소한 오해와 불편함도 겪을 필요가 없다. 하나뿐인 계산대 앞에 줄지어 기다리고, 서로가 원하는 물건을 집다가 생기는 자잘한 다툼, 이런 것들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여러모로 마감 직전에 오는 게 상호 간의 쾌적함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재차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가게 안으로 입장한 그는 차곡히 쌓여 있는 장바구니 하나를 들었다. 그날 사야 할 건 항상 미리 정해놓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일은 없다. 여러 선택지 중에 어떤 것을 집을지 고민하면서 조금 지체되긴 하지만 J는 매번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며 장을 본다. 숙면을 위한 맥주 두 캔을 담고, 안주로 먹을 비엔나소시지도 넣었다. 이날 비엔나소시지는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이었다. 누구나 좋아할 일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매 계획이 없다가도 혹할 수 있는 이벤트지만 그는 되레 스카치테이프로 묶여 있는 두 봉지를 떼어내 하나를 냉장 가판대에 올려 뒀다. 그에게 필요한 건 하나지 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돈을 덜 낼 생각도 없다. 정가대로 내되, 필요한 만큼만 사는 게 그의 리듬이다. 마켓주인도 이런 J의 성향을 아는 지라 그러러니 하고 내버려둔다.


이어 사과 두 개와 레토르트 미역국 한 개, 그리고 작은 참치캔 두 개 등을 마저 담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2만 3천560원이 나왔다. J가 가게에 들어와서 장을 보고 계산대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약 5분여. 수년을 매일같이 이 가게를 드나들면서 어느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꿰고있다. 여기에 장 목록을 다 정해놓고 오니 오래 걸릴 것도 없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은 그렇다면 마켇주인은 왜 마김시간보다 25분씩이나 더 늦게 마감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재고를 채워놔야 해서? 쓰레기 정리를 하느라? 그날 매상을 계산하기 때문에? 이 중 앞의 두 개는 다음날 아침 마켇주인의 남편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유가 되지 않는다. 세 번째는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매출정리는 마지막 손님인 J가 나가고 난 뒤 마켇주인이 하는 일이지만 하루에 손님 20명 내외가 올까 말까 한 가게에서 매상을 계산하는데 오래 거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는데 바로 J는 항상 10만 원짜리 수표로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J 나름의 논리가 있다. 요즘처럼 카드나 앱 결제가 일반화된 세상에서 수표는 말할 것도 없고 계산을 하려고 현금을 꺼내는 일조차 보기 드물어졌다. 즉, 10만 원짜리 수표는 본래 가치보다 더 귀한 것이 되었고 현실세계에서는 사라지다시피했다. 심지어 지하경제, 혹은 뒤로 몰래 주고받는 검디 검은 돈줄기의 흐름에서도 추적 가능한 수표는 쓰이지 않는다. 수표는 애초부터 큰 가치를 지닌 어마 무시한 종이 쪼가리였지만 오늘날에는 더욱 묵직해졌다. 마치 숨은 보물 찾기에서 담벼락 사이 틈새나 손을 뻗으면 다을락 말락 한 높이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당첨' 종이 같았다. 다만 지금의 수표 찾기 놀이는 난이도가 너무 높아 90% 이상의 숨겨진 수표가 사라지고 있었다. J에게 수표는 그러한 보물을 주는 것과 같은 거였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상대를 골려먹이려는 것도 아닌,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보물의 전달이었다. 여기에는 불편함의 최소화와는 전혀 다른 논리가 작용한다.


물론 마켇주인도 처음에는 J의 행동이 당황스러웠고 놀라웠으며 어떨 때는 짜증스럽기도 했다. 한 번은 10만 원짜리 수표를 J에게 집어던지며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라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래도 J는 매일 밤 같은 시간에 찾아와 똑같은 놀이를 반복했다. 마켇주인은 "제발 그러지 말라"며 J를 달랜 적도 있었다. 하루는 너무 약이 올라 마감을 더 일찍 하고 J를 아예 받지 말아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많아야 20명의 손님밖에 없는 작은 가게에서 매일 2~3만 원의 돈을 쓰는 고객을 놓치는 건 너무도 아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마켇주인은 아예 많은 잔돈을 준비해두기로 했다.


마켇주인은 돈통을 열어 잔돈을 꺼내 세기 시작했다. 10만 원 빼기 2만3천560원은 7만 6천440원. 먼저 5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고 1만 원권 한 장과 5천 원권 두 장을 더해 7만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천 원짜리 6장을 세어내 나머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나머지 440원이 나오지 않았다. 100원짜리 세 개에 50원짜리 동전 하나, 그리고 10원 6개가 전부였다. 30원이 빈다. 마켇주인은 바지 주머니와 외투 주머니, 개인 지갑을 다 뒤져봤지만 천원짜리 3장과 500원 동전 2개, 100원 동전 4개를 더 찾았을 뿐이다. 필요한 30원이 나오질 않았다. 어떻게 짜 맞춰 봐도 잔돈이 계산되지 않았다.


"손님, 정말 죄송한데... 지금 30원이 부족하네요... 혹시 내일 오실 때 마저 드려도 괜찮을까요?"


J는 생각하지 못한 전개에 당혹감을 느꼈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정이 딱하신 건 이해가 됩니다만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네요. 지금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그러면 좋은데 아무리 찾아도 맞출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다른 가게에서 돈을 바꿔오시는 건 어떨까요?"


잔돈이 없어 당황하고 초조했던 마켇주인은 점점 짜증 나기 시작했다. 3천 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300원도 아니고 30원인데! 안 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잔돈을 바꿔오라니? 심지어 이 주변에는 바로 옆 셔터문에 '임대'라고 붙여진 폐업한 분식집과 이미 문을 닫은 서점 밖에 없었다. 그나마 문을 연 곳이 가게를 왼쪽으로 끼고돌아 편도 30분 정도 걸어가야 나오는 편의점뿐이었다.


"지금 돈을 바꾸려면 저기 편의점을 가야 하는데 아무리 빨라도 50분은 걸릴 겁니다..."


다시 고민에 빠진 J.


"그럼 택시를 타고 갔다 오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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