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창의성, 유연한 사고 능력.
AI 기술의 발전 속도는 눈부실 정도로 빠릅니다. 사람이 직접 해야 할 일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머지않아 대부분의 업무를 AI가 대신하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인간은 오직 ‘최종적인 결정’만을 내리는 존재로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특히 오픈AI(챗GPT 개발 기업)가 발표한 로드맵에 따르면, AI 기술의 최종 지향점은 ‘조직형 AI(Organizations)’이라고 합니다. 이는 AI가 스스로 회사나 기관의 업무를 기획하고, 팀 간 협업을 주도하며, 심지어 직원 없이도 프로젝트를 나누고 결과를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을 의미합니다. 오픈AI는 이 변화를 10년 안에 실현할 계획이며, 규모가 작은 기업일수록 이러한 변화는 더욱 빠르게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 속에서 끝까지 인간의 몫으로 남게 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대부분이 "AI가 대체하지 못할 일"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AI와 지나치게 동떨어진 직업을 찾고 선택하려는 것에 거부감이 들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직업이 사라질까?”, “AI가 대체하지 못할 일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예측 리스트는 이미 인터넷상에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새롭게 등장할 직업에 대한 구체적인 명칭은 거의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직업들은 아직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름으로 명명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I를 활용해 어떤 기술이 실현된다면, 이러한 직업이 생겨날 것이다”와 같은 가정법적인 서술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을 짚어볼 수는 있지만, 직업의 명칭을 확정적으로 제시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저 또한 책을 구상하던 초기에는 새로운 직업의 명칭을 수집하는 데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AI 기술의 발전 흐름을 깊이 있게 살펴볼수록, 단순히 “이러한 직업이 생긴다”고 설명하는 것보다, “이러한 역량을 갖춘 디자이너라면 변화에 적응하고, 새롭게 등장할 직업군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편이 미래를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훨씬 실질적인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직업의 형태가 아직 불분명한 지금,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떤 역량을 갖추고 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학부모님들께서는 더 이상 디자인과가 취업률이 괜찮다는 이유만으로 자녀의 진로가 ‘디자이너’가 되기를 희망하셔서는 안 됩니다. 앞선 글들에서 설명드렸듯, 이제는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저는 ‘융합형 인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디자인 입시나 관련 진로를 염두에 두고 계신 학부모님들께서는 지금부터 저와 함께 '우리 자녀가 과연 융합형 인재에 가까운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셔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디자인 진로를 고려하고 있는 학생들 또한, 스스로가 융합형 인재에 가까운지 성찰해 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융합형 인재란? 생각이 유연하고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능력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창의적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AI의 등장으로 인해 가장 크게 흔들리고 있는 교육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암기’의 영역, 그리고 ‘정답’의 영역입니다. 이제 그런 일들은 AI가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정답을 맞히는 능력보다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질문을 생각할 줄 아는 사고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암기보다 창의력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도 점점 더 확산되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의 교육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창의력이란?
독창적인 사고, 확산적인 사고를 하여 전혀 다른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힘을 말합니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상상하고, 조합하고,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만들어냅니다. 단순한 '독특함'과는 달리, 실질적인 문제 해결이나, 새로운 가치창출을 해내는 힘입니다. AI의 확산 도구가 되지 않고, AI를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이 되려면 AI를 창의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힘이 필요하겠지요.
잠깐! ‘창의력’, 이 단어는 모두 처음 들어보는 개념은 아니실 것입니다. 네, 익숙하게 들어왔지만 실제 교육 현장에서는 늘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개념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창의력이 꼭 필요하다고, 거의 피를 토하듯 강의하고 강조해 왔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정답을 외워라”, “암기하면 된다”는 식의 교육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었고, 대한민국의 입시 제도는 후자의 방식에 능한 아이들이 성적 상위를 차지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과 학부모님들 역시 ‘암기’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대로 유연한 사고력이나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은 입시 이후에나 겨우 허락되는, 일종의 사치처럼 여겨졌습니다. 다시 말해, 암기 능력이 받쳐주지 않는 아이가 아무리 창의적이라 해도, 현실에서는 좀처럼 빛을 보기 어려운 구조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아이들은 진정으로, 깊고 넓은 사고력과 창의적인 발상이 요구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암기하고 정답을 찾아내는 일은 이제 AI가 훨씬 더 잘합니다. 아이들은 AI를 이용하거나, AI와 공생 하거나, AI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을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앞으로는 뻔한 정답은 AI가 찾아줄 것입니다. 그것도 인간보다 훨씬 더 논리정연하게 말입니다. 대신, 누가 더 창의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통해 AI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가에 따라 진짜 창의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뻔한 스토리는 외면받을 것입니다. 쉽고 뻔한 수준은 남들도 쉽고 뻔하게 AI를 이용해, 자기 생각이란 없는듯 복사 붙여넣기 처럼 생성해 낼 테니까요.
AI가 만들어내는 문장들은 그럴싸하다 못해 때로는 완벽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문장들은 ‘남’의 생각들이 집합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즉, 거기에는 오리지널리티, 고유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나’라는 존재는 다양한 경험이 혼합되어 형성된 하나의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은 남들과 얼핏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그 생각에 이르기까지의 경험과 감정의 궤적은 반드시 다른,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가치입니다.
이제는 그런 인간다움, 나만의 경험과 감수성으로 버무려진 사고의 연결고리와 결정체가 남다를수록, 더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않더라도, 어렴풋한 향수에서 비롯된 영감을 끄집어 낼 줄 아는 인간이 더욱 다채로운 결과물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명칭이나 지식은 필요할 때 AI를 통해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술을 다루는 인간의 경험과 이해, 철학과 가치관입니다. 바로 그것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핵심 역량입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유연하게 사고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선택과 접근 방식이, 기술 자체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게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든, 저 자신이 기업이 되든, 결국 그런 인간이래야 승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부터 그런 생각이 주 업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 직업을 가지길 원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술적인 인간들' 입니다. 그들은 감각, 창의성, 끊임없는 브레인스토밍으로 안될 것만 같은 일의 해답을 찾아내고, 전혀 상관 없을 것만 같았던 무언가를 끌어다 연결시키는 식의 유연한 사고 능력을 갖춰왔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예술가'로 칭하며, 사회를 점차 더 아름답게 가꾸어 나갔지요.
그리고 그 예술가들이 사회로 나와, 기업의 일원으로서 상업적인 미술을 하게 되면서 ‘디자이너’라는 직업군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디자이너라는 꿈을 진지하게 품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여 마침내 그 자리에 선 사람이라면, 그들은 대부분 이미 미래 시대가 요구하는 디자이너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포토샵으로 누끼를 따거나, 상세페이지를 복사하고 붙여넣는 수준의 단순 노동을 위해 디자이너의 길을 택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또한 교육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앞으로는 이러한 사고를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예술가적 감성과 감각을 지닌 아이들이 더욱 많이 양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술적 깊이를 지닌 결과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경쟁력을 갖춘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미래 사회에서 ‘디자이너’란 단순히 디자인 기술을 익힌 사람이 아니라, 진짜 디자인을 하고, 디자인을 이해하며, 디자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디자이너를 꿈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가끔, 성적이 좋지 않아서 미술을 하겠다고 하거나, 공부가 하기 싫어서 미술을 선택하겠다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당장은 공부하지 않고도 입시를 통과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져 달콤한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교양처럼 즐기고, 세상을 탐구하려는 자세를 갖춘 사람들이야말로 창의적인 생각을 꺼내올 수 있는 수많은 주머니를 갖게 됩니다. 그런 지적이고 감성적인 주머니들을 많이 지닌 사람이 진정한 창의적 인물이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게으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 이른바 '한량'들을 예술가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노 베이스' 로는 창의성이 자랄수가 없습니다. 기초 없는 예술가는 결국 예술가의 탈을 쓴 빈 껍데기일 뿐이며, 자신이 퍼낼 물조차 없는 마른 우물 앞에서 언젠가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기본적인 성향이 '예술적 인간'이라 해도, 예술의 기초 기술, 논리적인 공부 과목의 기초, 아주 기본적인 상식에 대한 암기까지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미래 직업 중에는, 딱히 어느 분야에서 활약하는 디자이너라는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크로스 디서플린 디자이너 라는 명칭을 가진 디자인 직군이 있습니다.
크로스(Cross)는 여러 분야나 영역을 넘나든다는 뜻, 디서플린(Discipline)은 학문 또는 분야, 디자이너(Designer)는 무언가를 디자인(창조,설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크로스 디서플린 디자이너는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디자인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AI와 자동화 시대에는 단순 기술보다 인간 중심의 창의성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단순히 기술을 구사하는 수준에서 머물러선 안되고, 심리학 미학 공학 등 복합적인 접근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단순한 기술은 점차적으로 AI로 대체되기 때문이며, 감각 없는 디자이너는 AI를 제대로 활용하는 위치에 서기 어렵습니다.
AI가 뛰어난 시대에 기업이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이유는 무엇이 될까요? 미적 영역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성취를 바탕으로 단단히 자리잡은 한 인간이, AI를 도구로서 활용하여, 그렇지 못한 인간의 결과물 보다 더 감성적이고 독창적고 인간적인 디자인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는 이 새로운 접근법을 가지고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교육계에서 알기 쉽게 정의해 보자면 ‘융합형 전문 인재’와 비슷하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여러 전문가들이 다양한 학문과 전문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창출하려 할 때, 이 디자이너 역시 전문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소화하면서도 다양한 분야와 협력하여 새로운 가치 창출에 기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들은 엔지니어, 재료 공학자, 환경 공학자, 마케터 등과 협력하여 ‘지속 가능한 디자인’의 설계로, 환경적 가치를 존중하는 제품들의 포괄적인 솔루션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이제 교육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상황을 보면, 결국 기존의 취업 시장에서 기술과 경력을 가지고 있던 디자이너들은, 그중 감각과 창의성까지 고루 갖춘 디자이너들에 비해 도태되고, 시장에서는 소수만 살아남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새로 양성될 디자이너들 또한 기술만을 중요시 여기기보단 감각과 창의성을 기르려 노력하고, 그것의 원천이 되는 다방면의 경험을 쌓아 나가야 하며, 자신만의 강점이 될 교양적인 면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융합형 인재’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융합형 인재’에 대해 이미 다수의 학부모님들이 들어보셨을 줄로 예상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시장에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이러한 미래를 예견한 교육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처음 대두되었을 땐 시장에서 ‘융합형 인재’라는 키워드 자체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요즘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미래에는 한 분야에 깊은 지식을 가진 전문가 보다,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분야의 지식과 능력을 통합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미술에서 시도하는 ‘융합형 인재상’은 어떤 사람인가. 위에서 말한 것 과 같이, 미술 분야에서 특히 다방면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시도나 타 지식과의 결합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 도모하며, 여러 분야의 지식을 다각도로 분석해 혁신적인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디자이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 아이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하는 것이냐고요? 이러한 인재상에 대해 이 책의 뒷부분에서 더 깊이 다룰 예정이니 함께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급변하는 AI시대, 미술 전공자의 현직 전문가 다운 시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