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린 Sep 22. 2021

10대는 아빠와의 애착이 필요하다

나의 최선이 가족에게 최악?


  우연히 이탈리아 볼로냐에 도서전을 참관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8시가 되자 상점들이 문을 닫고 거리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몇몇 군데 가게가 열리기는 했지만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죠. 낮 동안 흥성스럽던 이들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가이드가 말해주더군요. 한국의 도시들이 밤에도 일하고, 새벽까지 유흥과 쾌락으로 소란할 때, 유럽의 도시는 가정으로 돌아간다고. 파리나 프라하처럼 대표적인 관광도시를 제외하면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게 유럽의 도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두어 차례 유럽을 다녀왔지만 다른 도시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죠.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동료들과 스트레스를 풀고, 다음날 다시 출근해서 또다시 열심히 일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문득 그 최선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때 또 다른 삽화가 떠올랐습니다.


  큰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였습니다. 유치원에서 그려온 그림을 우연히 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의 중앙에는 엄마와 큰딸, 그리고 막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고, 한쪽 벽에는 TV가, 그리고 한쪽 귀퉁이에는 아주 작게 그려진 한 남자의 모습이 있었죠. 바로 내 모습이었습니다. 그 시절 3학년 담임을 하느라 밤에 늦는 일이 잦았고, 휴일에는 피로감에 젖어 하루 종일 TV 앞에서 뒹굴거리며 지냈었습니다. 어린 딸이 그린 그림이었지만 서운했지요. 아빠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몰라 주는 아이가 야속했습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 아빠는 늘 TV 앞에서 뒹구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오래전 속상했던 일이 다시 떠올랐던 건 나의 최선이 가족에게는 최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굳이 아등바등 일에 치이지 않고, 밤늦게까지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잘 살아가는 유럽의 도시인들을 보며 내 생활이, 10대들을 둔 아빠로서의 생활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이 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지요. 저녁 시간에 하던 일도 줄이고, 동료와의 회식도 일절 끊고 집으로 귀환했습니다. 



아빠도 안전기지가 될 수 있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처음에 딱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잔소리만 늘어서 서로에게 스트레스만 줄 때도 있었죠. 그러다 이게 아니다 싶어 딸들의 뜻을 맞춰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종종 학교 숙제를 봐달라고 하고, 글쓰기 과제를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휴일이면 둘째는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성화였고, 첫째는 베이킹을 하자고 졸랐습니다. 다행히 내가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왔던 거죠. 옥시토신 같은 친밀의 호르몬이 식구들 사이에 흘렀던 것입니다. 만약 너무 늦게 돌아왔다면, 나는 아마 집안에 쓸모없이 방치된 가구나 오랫동안 쓰지 않는 식기 취급을 당했겠지요.


  그 후로 큰딸과 막내는 시험을 망치거나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 크게 망설이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고는 했습니다. 마치 아빠를 자신들의 안전기지로 삼는 것 같았죠. 서로에 대한 애착과 신뢰가 견고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애착은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꽤 중요한 주제입니다. 발달심리학자 존 볼비는 애착이란 불완전한 개체가 생존을 위해서 자신보다 성숙한 존재에게 의지하는 전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애착이 안정적으로 형성된 아동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반면, 애착이 불완전한 아동은 불안이 높고 산만하며, 일관성이 없고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생애 초기에 애착은 주로 어머니와 형성됩니다. 어머니가 아이의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요. 아빠와의 애착은 주로 놀이할 때 나타나며 그 외의 일상에서는 엄마와의 애착이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10대가 되고 독립을 준비하면서부터 아빠와의 애착이 차츰 중요해지기 시작합니다. 연약한 아동기, 생존을 위해 엄마와 애착했다면, 독립을 준비하는 10대는 모험과 탐색을 위해 아빠와의 애착을 자연스럽게 추구하죠. 애착이 잘 형성되어 있는 경우, 10대들은 아빠를 자기의 안전기지로 여기고 더 과감하고 모험적인 시도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시기 아빠가 곁에 없다면 어떨까요? 모험을 덜 추구하고 행여 추구하더라도 불안이 높을 것입니다. 


10대 시절 엄마보다 아빠 역할이 더 클까?


  10대에게 독립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두렵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때 자신을 지지하고 인정하며 때로는 위로해줄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아빠와의 애착이 필요한 까닭이지요. 그럼 아빠가 없는 10대들은 어쩌냐고요? 다행히 아빠를 대체할 애착의 대상이 없는 건 아닙니다. 선생님이나 선배, 혹은 가족 중 연장자가 아빠를 대신할 수도 있고 종교적인 신이나 위인들도 멘토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있다면, 아빠가 안전기지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일을 줄이고, 사교를 줄이고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모가 함께 있을 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그냥 가만히 곁에 지켜만 있어도 10대들은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럼 자녀를 위해 일과 여흥을 포기해야 할까요? 어차피 10대는 몇 년이면 지나갑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잠시라도 함께 있는 것은 아빠로서의 의무입니다. 10대는 다시 태어난 갓난아이와 같습니다. 어쩌면 갓난아이보다 더 키우기 까다로운 존재죠. 그러니 가족의 일상으로 귀환해서 10대를 지원해줘야 합니다. 


  언젠가 휴일에 늦잠을 즐길 때였습니다. 누군가가 몸을 더듬는 느낌이 들어서 잠을 깼죠. 잠시 후 은밀하고 조용하게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빠,……, 돈 좀 있어? 헤헤.” 

  큰딸이었습니다. 친구랑 약속이 있는데 용돈으로 부족했던 거죠. 엄마 모르게 돈을 융통해달라는 큰딸의 부탁이 어찌 그리 귀엽고 사랑스러운지요. 딸에게 내가 안전기지가 되어 주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아빠로서의 자존감이 수직 상승했습니다. 큰딸이 펼칠 사회적 모험에 든든한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준다는 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낡은 가구로 살 것인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로 살아갈지는 아빠들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부모생활을 위한 팁!


아빠들, 일주일 혹은 한 달에 가족과 시간은 얼마나 보낼까요?
더 늦기 전에 돌아가시죠!
아빠들, 집에서 자녀와 할 게 없나요? 애한테 물어보세요. 답이 없어요?
그럼 지금까지 잘못한 겁니다.
주말에 루틴을 만들어보세요.
 짧게라도 서로 쉴 수 있는, 산책, 영화보기? 음주는 빼고!
부모가 작은 관심만 보여도 애는 달라집니다.
이전 16화 나도 모르게 따라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