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부는날 Oct 25. 2019

내일은 모르니까

차가 마당에 들어서자 곱게 화장을 한 엄마와 이모가 우릴 반겼다. 뒤이어 나온 아빠도 표정이 밝았다. 끝내주는 가을 날씨였다. 나는 기다란 니트원피스를, 남편은 스웨트 셔츠를 입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그 집의 가을이 근사했다. 아빠가 정갈하게 깎아놓은 잔디도, 오밀조밀한 꽃들이 핀 화단도, 아직은 얇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도.


"다혜야, 니네 엄마 너무 예쁘지?"

이모는 꼬마 여동생 머리를 땋아주는 언니 같은 표정이었다. 같이 나란히 앉아 화장을 하고 우릴 기다렸다며. 엄마는 예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그날엄마는 정말 예뻤다. 우리는 'LOVE YOU HEE'라는 글자로 장식한 케이크를 펼쳤고, 선물로 준비한 작은 손가방을 꺼냈다.

"엄마, 다음에 이거 들고 서울 와. 같이 쇼핑하자."

그러자고 대답하던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아빠가 사들고 왔다는 장미 꽃다발이 테이블 위에 있었고, 우리가 선물한 생일카드가 책장 위에 놓였다.


소파에 앉아있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웠었다. 엄마 손을 만지며 엄마는 손이 참 예쁘다고 했었다. 남편과 마당에 나와 집을 보며 말했다. "오늘 너무 행복하다."


그 날은 엄마가 떠나기 바로 전 날이다. 우리는 내일을 손톱만큼도, 정말이지 먼지 한 톨만큼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그 날은, 나에게 악몽 같은 기억이 되었다. 그 날의 모든 것은 내가 모르고 지나친, 놓쳐버린 기회들이 되었다. 그 날 행복하던 나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여러 번 보아서 대사와 소품까지 다 외워버린 영화처 그 하루의 기억은 너무도 자세하지만, 애써 의식에서 밀어냈다. 하지만 그게 밀어낸다고 해서 밀려나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 익숙한 장면들은 수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두려움 없는 우리의 얼굴이 보인다. 내일을 모르는 아빠, 이모, 남편, 나, 그리고 엄마.


그 날이 아름다웠던 건, 아무 이유도 아무 의도도 없다. 그저 살아가는 날들 중 하루, 참 좋은 날이었다. 내일이 어떻게 되었든, 그날 빛나던 우리의 행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그렇다. 내일은 알 수 없다는 것.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혹은 내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아무 날에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걸 알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늘을 사는 것뿐이다. 나의 불행보다는 행복에 집중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 저녁, 난장판이 된 집안을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다 눈물이 찔끔 났다. 누추한 옷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깔깔 웃는 우리 세 명이 너무 벅차게 행복해서. 유모차를 밀면서 아이의 옹알거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도 그렇다. 피곤한 몸을 침대에 함께 뉘이고 손을 잡아보는 순간도 그렇다. 바로 지금처럼 조용한 집, 식탁에 앉아 나에게 집중하는 순간도 그렇다. 는 이 모든 게 완전한 행복임을 안다.


그래서 내일 같은 건 두렵지 않다. 나는 내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있을 뿐이다. 그 자체로 감사하다. 종교는 없지만, 신이 있다면 살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이전 21화 네가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