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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날 Oct 29. 2019

나의 사람


첫 데이트, 길가의 하얗고 귀여운 차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 멀리서 잠시 지켜보았던 것 같다. 나를 찾는 그 눈길이 좋아서.


"제가 운전을 하면, 사람들이 화를 내요."

"네? 왜요?"

"보시면 알아요. 그래서 저 지금 좀 긴장돼요."


때는 이제 막 온기가 돌기 시작하던 늦겨울, 목적지는 파주 헤이리였다. 귀여운 그의 차는 자유로에 올라탔고, 주위가 시끄러워기 시작했다.


빵빵!! 빵빵빵!!!! 뒷 차들은 연신 클락션을 울려댔고 신경질을 부리듯 굉음을 내며 우릴 추월했다. 와, 이건 느려도 너무 느렸다. 경주하듯 달리는 차들 사이, 쏟아지는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그는 절대 액셀에 올려진 발에 힘을 주지 않았다. 전쟁터 속에서 홀로 평온한 그를 보며 결심했다.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지.'





나의 결심은 이루어졌지만 초심을 잃었다. 아이는 차에 타면 조수석을 가리키며 "아빠 꺼!"라고 한다. 이제 나는 웬만해선 그에게 운전대를 넘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날 나의 결심은 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만약 내 곁에 그가 없었다면, 나는 절대로 내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그토록 느리고 평온하게 지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여러 날 밤잠을 설쳤다. 잠들지 못하는 밤엔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눕자마자 잠이 드는 남편의 곤한 숨소리는 이상하게 원망스러웠다. 어떤 밤, 잠 들려는 노력과 실패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 시계를 보고 짜증이 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울 아이를 두려워하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 잠이 너무 안 와." 한숨처럼 내뱉은 작은 소리에 꿈틀대며 일어난 남편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내 발밑으로 내려가 발과 다리를 주물렀다.


"고마워."

"진작 깨우지 그랬어."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나는 앉아만 있는데 뭐."


그리고 바로 잠들었다고 한다. 아침에 남편은 내가 갑자기 코를 골았다며 웃었다. 그렇게 쉽게 잠들다니. 우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날 이후 잠이 오지 않을 때 남편을 깨우면, 그는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려 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늘 몇 분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든다.


나에게 그는 불안의 반대말이다. 엄마가 떠난 후, 그는 줄곧 아주 소중한 것을 애써 지키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거리가 없었지만, 그는 나의 슬픔에 대해서는 거리를 지켰다. 어쩌면 그 거리가 그에게는 또 다른 슬픔이었을까. 그는 처음부터 날 반하게 했던 그 한결같음으로, 울고 있는 내 곁, 딱 한 걸음 옆에서 언제나 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가 계속 거기에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아이의 귀여운 동영상을 함께 보다 남편이 슬쩍 눈물을 보였다. 이럴 때마다 장모님 생각이 난다며. 아, 그렇구나. 이 사람에게도 상처였구나. 아무도, 나조차도 알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아픔이었구나. 나는 이 사람 옆에서 어쩌면 이렇게 철이 없어지는 걸까. 오로지 나만 생각하게 되는 걸까.


 아, 나도 당신을 지키는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까똑', 남편이다. 집 근처 설렁탕집 기프트콘과 함께, 꼭 챙겨 먹으라는 부탁. 아무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자신이 없다. 그냥 나의 사람이 너무 애쓰지 않도록, 나 하나라도 잘 지키며 살아야겠다. 오늘 이 설렁탕이라도 잊지 않고 잘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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