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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Sep 18. 2019

향수병(鄕愁病)에 가라앉다.

지금, 나와 같이 향수병을 경험해보자.

BGM - in a new space / fantompower (Chillhop Essentials - Fall 2018)


시작은 간단하다.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을 상상하면 된다. 바다, 강, 호수, 수영장 등 수심이 깊으면 좋고 깊지 않아도 그만이다. 나는 한낮의 직사광선이 쨍하게 내리쪼이는 한가운데에 연푸른 빛깔의 투명한 물이 일렁이는 한적한 수영장을 떠올리려고 한다.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향수병(鄕愁甁)'의 '근심 수(愁)'를 멋대로 '물 수(水)'로 바꾼 뒤 향수라는 이름의 물 안에 천천히 빠져버릴 수 있다면 누구든 나와 함께 향수병을 경험할 수 있다.


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코를 막아도, 눈을 찡긋 감아도, 심호흡해도 좋다. 나름의 준비 운동이라는 걸 해도 말리지 않겠다. 어차피 물 안에 가라앉는 순간 온몸을 휘감는 차가운 물길이 그전의 모든 행동을 순식간에, 그리고 일제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 테니까.



물방울 하나


물속으로 들어간 직후에 펼쳐지는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게 꼭 다시 태어난 것만 같다. 향수병은 나약한 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 햇살을 잔뜩 품은 푸른 물이 아름다워 괜히 코로 숨을 내쉬며 물방울 여러 개를 만들어본다. 타향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이들의 특권인 허니문 기간(Honeymoon Phase)에 흠뻑 빠져 있다. 20여 년 인생을 따로 떼어 고향에 두고 새로운 곳에 오니 모든 것이 신선하다.


가끔은 캠프나 수련회에 온 것 같기도 하다. 낯선 이들에게 과거의 나를 설명하고 미래의 나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눈을 떠서 출근하고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뒤 퇴근한다. 가족과,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잠이 들고는 한다. 다시 일어나서 눈을 뜨는 것을 반복하며 또다시 새로운 세상에 나를 소개한다. 역할놀이가 더해진 수학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 손짓과 발짓을 더해 쨍한 햇빛에 드리워지는 물속 그림자를 만들며 즐거워한다.




물방울 둘


물 안에서 20초가 지나면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는데 외지 생활에서 물 밑의 20초에 필적하는 시간이 지날 때 내 호흡도 짧아지고 절박하게 반복된다. 한 달에 두어 번 주말에 고향에 간다고 짐을 쌌다가 다시 타지로 내려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운명이 나를 고향에서 생으로 떼어놓는 잔혹함을 느끼고 치를 떤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면서 호흡이 얄팍해진다. 내가 무슨 부귀와 영화를 누리려고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분노가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피어오르는 화는 대부분 터지지 못하고 연기처럼 힘을 잃고 안에서 침잠해 점차 쌓여나간다.


쌓아 올린 분노는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만든다. '예전에 부산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서면이 이제 많이 살기 좋아졌다.', '나중에 회사에서 연차가 쌓이면 부산에서 이런 일을 해보려고 한다.'며 자연스레 고향에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논하는 타지의 수많은 직장 동료와 지인의 행복을 쏘아본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말한다. '너희는 여기가 고향이잖아. 고향이 곧 삶의 터전이잖아. 살던 곳이 사는 곳이 아닌 이의 서러움을 너희가 알아?' 내 안의 아우성이 계속 메아리를 낳는다. 메아리가 퍼져 항의하듯 쿵쿵 수면을 때리며 자잘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누가 일상에 물을 가득 들어부었다. 집과 회사가 거대한 수조로 변해 마치 그 물속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붕붕 뜬 채 환각에 젖어 있다. 물 안의 수압이 익숙하지 않다. 현실인지 물속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물방울 셋


감정 하나를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들어찬 분노를 파도가 몰고 나간 듯이 자취를 감춘 자리에는 자각의 상태가 자리하게 된다. '어디에 닻을 내리고 살 것인가.'에 대한 인지가 들어찬다. 삶의 터전이 곧 나의 뿌리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미래가 진회색 수채화 물감으로 몇 번이나 덧칠된 것처럼 흐려진다. 나는 불안하게 걸쳐진 삶을 영위하는 경계인이다.


어느 날 문득, 걷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본다. 90%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10%의 시간을 고향에서 보낸다. 그러니 나의 근거지는 시간만 많이 보내는 이곳, 타지인가, 마음만 많이 쏟을 뿐인 저곳인가?


직장도 구했으니 이제 부산에서 연애도 하고 결혼해서 자리 잡아야겠네요?
영영 서울에는 안 올라올 생각인 거야?
살기 좋은 지역이라 서울보다 더 좋을걸?
어른 되고 나서 새로운 지역에서 시작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경력은 계속 이곳에서 쌓을 계획인 거죠?
이제 예전처럼 서울에서 못 보겠다, 그치?


물에서 숨을 꾹 참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들어차는 질문 세례에 컥컥거리며 물을 먹는다. 쉴 새 없이 아픈 기침을 토해냈다. 머리가 띵하다.




깨끗하게 투명한, 크고 동그란 눈물의 방울


버티면 버틸수록 정신이 흐려진다.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는데 본인만 예전의 올곧은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가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끌어모아 내게 퍼붓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만 슬프고 나만 힘들다. 내가 이 세상 모든 비극의 주인공이다. 작은 사건에도 쉽게 의기소침해지고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지?'라는 질문을 반복한다.


수면 아래에서 눈 깜박임이 점점 느려진다. 삶의 활력을 잃고 자주 무기력해진다. 도시는 나를 밀어낸다. 나를 포근히 안아줬던 고향과 달리 도시가 온몸으로 나를 밀어낸다. 미래의 계획이나 앞으로의 포부 따위는 인생의 금기어가 된 지 오래다. 오점 하나 없이 깨끗하게 투명한, 크고 동그란 눈물의 방울을 꼭 안게 되었다. 팔다리가 힘없이 축 늘어진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물방울들


어느 날이었다. 가지고 있던 눈물의 방울을 펑하고 터뜨렸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조각난 물방울이 터져나갔다. 속수무책으로 터져나가는 물방울들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무겁게 안고 있던 눈물의 방울이 어느새 사라졌다.


나를 짓누르던 눈물의 방울이 없어졌다고 해서 내가 가볍게 수면 위로 붕 뜬 것은 아니었다.


그리움은 여전히 간절히 매달려 있었다. 가족이, 친구가, 살던 동네가, 밤을 밝히던 수많은 조명들이, 그리고 찾아왔던 아침의 산뜻함이, 청량한 흙냄새가, 봄이면 나를 반겼던 새하얀 매화나무가, 꺄르륵 웃음이 터지는 초등학교 운동장이, 무심히 지나쳐가는 버스가.. 가을 속의 별들을 헤던 시인 윤동주처럼 내 기억 속에 자리하는 추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하나씩 손으로 주워봤다.


손바닥을 펼친 순간 모든 기억들이 이내 물거품이 되어 손 안에서 잘게 흩어져나갔다. 보글보글 탄산 소리를 내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물에서 나왔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모르겠다. 수면 위의 시간과 아래의 시간은 다른 것 같다. 물에 가라앉았다 빠져나온 것도 꿈이었던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눈이 시리고 코끝은 알싸하게 아리다. '킁' 소리를 내며 물로 가득 찬 코를 풀어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웅성웅성 피어나는 속삭임인지 말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먹먹한 귀에 와 닿는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돼서 괜찮아진대.
무드셀라 증후군 아니야? 과거를 너무 미화하지 마.
서두르지 말고 적응하려고 노력해봐. 취미 생활도 해보고 친구도 하나둘 사귀다 보면 좋아질 거야.
자꾸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니까 너의 그런 부정적인 태도가 너를 더 힘들게 하잖아.
지금 이 시기를 극복하고 나면 뿌듯할 거야.
내가 보기에 너는 그냥 우울감에 빠져서 현실을 도피하는 거로 보여.


질척질척 들러붙는 문장들을 떼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흐렸던 초점이 한 곳에 맞춰진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나 향수에 빠졌었나봐.'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처럼 참 쉽게 나는 향수에 빠져 있었다. 내가 빠져있었던 것이 향수였는지 그냥 물인지도 모르고 그 속에 힘없이 가라앉아있었다. 언제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향수병은 그렇게나 쉽고 또 그렇게나 어렵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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