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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Mar 31. 2019

혼밥을 합니다.

외로움 한 공기에 슬픔 한 숟가락

이 정도 수준의 밥을 나는 '밥다운 밥'이라고 부르는데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60일 분량의 식사가 희생됐다.

"시간이 지나면 냄비 안에 물이 쫄아들어서 밥에 움푹 움푹 구멍이 생겨. 이때 불을 약하게 줄여.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냄비 바닥에서부터 타닥타닥 소리가 나. 그때 불을 완전히 끄고 3-4분 정도 뚜껑 덮은 채로 뜸을 들여. 다 되면 주걱으로 밥 고루고루 섞는 거 잊지 말고."


고개를 45도로 기울인 채 찡그린 얼굴로 한 손은 전화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펜을 쥔 채 메모지에 열심히 통화 내용을 받아 적는다. 라면 1 봉지에 맞는 물 양도 제대로 못 맞추는 내가 삼시 세끼를 독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엄마는 가기 전에 '냄비 밥' 하는 법만이라도 마스터하고 가라고 몇 번을 강조했지만 어깨너머로 엄마가 하는 요리를 대충 보기만 했을 뿐 제대로 배운 적은 한 번도 없다. '밥하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너무나도 귀찮고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살림살이에 젬병인 내가 '밥', '설거지', '청소', '빨래' 등의 단어 중에서 어느 단어를 들어야 얼굴을 찌푸리지 않겠냐만서도 밥하는 일은 중고등학교 시절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것만큼이나 골치 아프고 엮이기 싫은 일이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요란한 벨소리를 낸다. 그래, 밥 말고 오늘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가 저 베란다 안에 있다. 휴대폰을 든 채로 베란다 문을 봤다가 두 눈은 곧 싱크대로 향한다. 그릇과 식기류를 잔뜩 삼킨 싱크대에 뭐 하나만 더 넣었다가는 언제라도 숟가락과 접시를 퉤퉤 하고 뱉어낼 모양새다. 고개를 쓱 돌려 벽에 달라붙은 시계를 본다. 12시. 오늘도 어김없이 꿈만 같은 내 토요일이 꿈처럼 스쳐 지나갈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엄마, 나 이제 빨래 널러 가야 돼. 한 번 해볼게. 모르는 거 있으면 문자 할게."




사람은 하루에 왜 이렇게 많은 양의 식사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철저하게 동물적 본능에 기인한 식사라는 행위에는 인간의 허례허식이 얼룩덜룩 묻어 나같이 자취하는 이들을 궁지로 내몬다. '다음에 밥이나 한 번 먹자.'의 흔한 안부 인사가 식사는 식욕 충족은 물론 관계 형성까지 내포한다는 의미를 암묵적으로 시사한다. 필수 불가결하면서도 어정쩡하게 사회적인 이 행위가 안에서나 밖에서나 혼자인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내 주변에 진한 테두리를 그려서 '함께 식사하는 이들'로부터 동떨어지게 만든다.


1인 가구인 나의 범주를 적나라하게 깨닫게 해주는 곳은 마트다. 한국인이 집착하는 '밥다운 밥'을 만들어 먹기 위해 마트 한 바퀴만 둘러봐도 1인 가구가 밥다운 밥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소리인지를 금방 깨닫게 된다. 대파를 들어 카트에 넣으려다 양이 너무 많아 다시 내려놓는다. 지난번에 샀다가 다 먹지도 못하고 절반 이상이 냉장고에서 썩은 음식 쓰레기로 발견됐다. 부사 사과가 철이라고 얼핏 들은 것 같다. 봉지 안에 어림잡아 못해도 사과 8개는 들어있다. 사과 다이어트하는 것도 아닌데 깎아먹고, 갈아먹고, 샐러드에 넣어 먹고 하다가 꿈에도 사과 농장이 펼쳐질 것 같은 불길한 미래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사해서 죽지 않을 만큼의 양만 사자.' 자취를 시작하고 생긴 신조 하나를 속으로 읊으며 다음 코너로 향하자 ‘가정간편식’ 제품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컵에 든 밥, 봉지에 든 액상 찌개, 큰 상자에 들어간 냉동 요리 등 상상 가능한 집밥은 이 코너에 다 있다. 컵밥 하나를 들어 보니 그럴듯한 '조리 예'가 있다. 친절한 그림이 곁들여진 조리 설명을 읽어보니 만드는 데 도합 20분 정도 소요된단다. 이 정도 요리를 직접 만들려고 하면 3시간은 걸릴 테니 평소보다 9분의 1 정도의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셈이다. 흘끗 가격표를 보니 가격도 적당하다. 가벼운 몸짓으로 그대로 카트에 담으려다가 멈칫한다. 카트 안에 쌀, 고기, 채소, 간장, 고추장이 담겨 있다. 어떻게든 제대로 된 집밥을 먹어보겠다는 내 마지막 몸부림들이 카트 안에 담긴 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손에 들린 가정간편식, 아니 인스턴트 음식을 다시 본다.


'나 같은 사람들은 가정식도 "간편"하게 먹어야 되는 건가?'


제대로 된 재료를 사려하면 기본이 3-4인 기준의 양이고 1인 기준에 맞게 나온 음식은 영양소가 형편없고 가공된 맛과 향이 입안과 코를 맴돈다. 요리하는 과정이 생략된 대신 생략된 과정이 의심스럽다. 혼자 사는 너희들은 밥다운 밥이 아닌 간단하게 해결하는 '끼니'가 적당하다고 일러주는 것 같아 얼굴을 찡그리며 코너를 쓱 지나친다.



살면서 처음 해 본 냄비밥

3시에 시작한 요리는 6시에 겨우 완성됐다. 칼등이 재료에 향하게, 칼날이 손에 닿도록 칼을 뒤집어서 사용할 뻔한 아찔한 경험을 시작으로 무의미한 냉장고의 여닫음과 가는 곳마다 물이며 재료를 뚝뚝 바닥에 떨어뜨리는 '헨젤과 그레텔 놀이'를 수십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3시간이 지나갔다. 오늘 저녁의 미션이 혹시 부엌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아니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식탁에 드르륵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밥 한 숟가락을 뜨려다가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멈칫한다. 잊은 것이 하나 있다.


거실로 가 TV를 켜니 웅웅 TV가 만들어내는 소음이 공간을 꽉 메운다. 이제야 안정감이 든다. 함께 밥 먹을 사람이 없다면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과 유사한 소음이라도 있어야 한다. 최소한의 소음도 없으면 무리에서 이탈해 홀로 풀을 우적우적 씹으며 허기를 달래는 한 마리의 동물이 된 기분이다. 배경으로 흐르는 저 정도의 소음이면 그래도 덜 처절하고 덜 원초적인 식사가 될 것 같다. 밥 먹는 순간에도 굳이 혼자임을 상기시켜 입맛을 잃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엄마가 알려준 재료와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서인지 모양도 그럴듯한 게 오늘은 왠지 맛이 기대되면서 떨리기까지 하다. 밥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욱여넣고 막 끓인 된장찌개 한 숟가락을 떠먹는다. 


여전히 맛이 없다. 간도 맞고 식감도 적당한데 말 그대로 없는 맛. 밥알이 무(無)로 가득한 그런 맛이다. 멍한 눈으로 TV 속 그림을 쳐다보며 느릿느릿하게 밥알을 꼭꼭 씹어 꿀꺽 넘긴다. 다음 숟가락질하기가 꺼려진다. 맛 때문인지 감정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빨리 먹고 치우자. 이렇게 먹다가 설거지는 또 언제 할 거야.' 혼자 지내며 늘은 혼잣말을 하며 다음 밥 한 숟가락을 크게 푼다.




마트가 선사하는 수치심과 집에서의 식사가 건네는 적막함을 피해 외식을 하면 불편한 감정은 배가된다. 평일 퇴근 후에는 두세 시간씩 요리할 엄두가 나지를 않아 어느 곳에서 끼니를 해결할까 고민한다.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고민 끝에 나오는 답은 결국 자주 가는 회사 근처의 분식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르바이트생이 익숙한 얼굴을 본 것 마냥 눈인사를 한다. 불편한 다정함에 나도 까딱 묵례를 하고 주문한다.


"크림치즈 김밥 하나랑, 돈가스 하나랑, 쫄면 하나요."


혼자서 다 못 먹을 양을 주문하는 것은 혼자서 먹지만 그래도 그럴듯하게 먹겠다는 쓸데없는 오기 때문이다. 혼자 먹으면 누군가와 함께 먹을 때처럼 다양한 음식을 못 먹는다는 한계가 못내 싫었다. 이미 식당을 정할 때도 혼자서 식사하기에 심리적 부담감이 덜 드는 식당으로 한계를 지어 분식집에 왔는데 메뉴에도 제한을 두는 게 너무 구차해 보였다. 혼밥은, 식사는, 여러 의미에서 사람을 참 구차하게 만든다.


의자 하나에는 가방과 짐을 두고 맞은편 다른 의자에 털썩 앉아 천장 한 구석에 처박힌 TV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지직 움직이는 그림만 멍하니 보다가 다른 테이블에서 친구와 밥 먹는 사람, 연인과 밥 먹는 사람, 나처럼 혼자 먹는 사람을 차례차례 물끄러미 본다. 창밖을 보니 어둑어둑한 분위기 사이로 여러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간다. 불쑥 끼어든 목소리가 나를 깨운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음식 세팅이 익숙한 게 '내가 이 집에서 어지간히 많이 사 먹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속이 꽉 차게 굵게 말린 김밥 하나를 들어 입안에 쑤셔 넣는다. 우물우물 씹으니까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정갈하고 단정하게 정제된 맛이다. 그래서 정이 없고 싸늘하기까지 한 맛이다. 음식을 먹을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고 만든 맛이다. 나는 이런 사소한 음식 맛에도 예민해진 우울한 혼밥러가 돼버렸다. 핸드폰이 지잉지잉 울린다. 엄마다.


"퇴근했어? 밥은?"

"집에 가서 해 먹으려고."

"그래 밥은 든든하게 먹고 다녀. 이상한 거 사 먹지 말고."

"엄마, 나 버스 탈게. 알았어. 이따 다시 전화할게."


해 먹기는 무슨. 있는 밥을 입안에 쑤셔 넣기도 벅차다. 탁 소리가 나게 전화기를 내려놓고 젓가락으로 숟가락이 꽉 차도록 밥을 얹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꽉 차게 담긴 외로움 한 공기에 슬픔 한 숟가락을 가득 떠서 꾸역꾸역 삼키네.'


입안에 숟가락을 집어넣고 그대로 내용물을 꿀꺽 삼킨다. 매일 삼시 세 끼, 내가 해결해야 할 끼니가 너무 많다.




명상의 한 개념 중에 '마인드풀 이팅(Mindful Eating)'이라는 개념이 있다. 음식을 꼭꼭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하고, 음식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 배가 차는 순간순간의 느낌에 집중하는 명상의 한 행위이다. 이런 식사는 명상의 근간을 이루는 '현존'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현재에 집중하며 식사의 순간에도 감사하고 행복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런데 삼시 세끼 혼밥을 해야 하는 1인 가구인 나에게 저런 마인드풀 이팅은 오히려 독이었다. 아니 당시에 나는 개념도 몰랐으면서 마인드풀 이팅에 너무 몰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밥알인지 슬픔인지 모를 것을 꼭꼭 씹으며 꿀꺽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켜내면 배안에는 여전히 허기가 가득 찼었다. 만 25년 인생에 혼밥을 이렇게 주기적으로, 장기적으로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눈을 뜨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면 빈 속이 식사할 시간임을 알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독립적으로 척척 해내는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식사는 그런 나마저도 한없이 약하게 만들었다. '먹는 것까지 함께 먹어야 하는 한국인의 습성을 이해 못하겠다.'라고 말하며 신랄하게 누군가를 비난하던 나는 어디 가고 의미 없는 숟가락질과 젓가락질 사이의 적막감마저 두려워하는 나약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일 수밖에 없어서 언제든 혼자일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큰소리치면서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그 처지가 되면 이유도 모르고 한없이 우울해진다. 그게 혼밥이고, 외로움이었다. 두 번 다시는 이 짓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작게 중얼거리게 만드는, 그런 구차한 행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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