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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아이 May 12. 2023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굴려 먹는 사탕'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제목을 보고 책을 뽑아 들며 내가 기대한 것은 제목 그대로였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것. 아마도 책의 주인공이 머물고 있는 곳은 리스본이 아닌 어느 곳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야간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면, 그곳이 '리스본'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기대였다.


소설의 오프닝은 좋은 분위기였다. 비 오는 날 갑작스럽게 그레고리우스의 인생에 난입한 '포르투갈어', 그로 인해 자신이 있던 자리를 충동적으로 박차고 나와 훌쩍 몸을 싣게 된 리스본행 열차. 바뀌는 풍경과 들려오는 낯선 언어. 무언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그를 겪어본 적 없던 세계로 안내할 아마데우의 책이 들려 있었다.


'나머지'의 부름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p31


그러나 오랜 세월 베른 시를 떠나지 않았던 진지한 학자 그레고리우스가 별안간 모든 걸 버려두고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일까? 그 충동적인 여행의 이유가, '포르투게스'라고 의미심장하게 내뱉는 여자의 포르투갈어 한 마디라는 것은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훌쩍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훌쩍'이다. 그가 떠나는 이유에 설득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훌쩍'이 아니라 '찬찬히' 떠나는 여행이었을 것이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보아야 할 것들을 정하고, 일상을 스케줄을 정리하고, 합리적인 교통편을 알아보다가, 문득 이 모든 것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비울 수 없는 스케줄, 버려둔 일상에서 일어나게 될 무겁고 현실적인 일들.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학문과 유지하고 있는 생활에 대한 만족. 그렇게 그는 여태껏 베른을 떠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하면서.


그런 그의 작은 세계에 '포르투게스'란 낯선 단어는 설득력을 벗어난 커다란 파문이다. 들어본 적 없는 억양과 이질적인 단어의 질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태어나서 살아가고 마침내 베른의 학자로서 죽게 될 그 작은 세계 너머에 더 큰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 큰 부분에 속할 수도 있었을 가능성, '나머지' 세계의 자신. 그 자신을 찾으러 그는 리스본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p60


어떤 징조


여기까지가 소설의 시작이었다. 나름대로 설레는 출발이었다. 그가 리스본행 열차를 타고 여러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수없이 다시 베른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는 모습과, 마침내 리스본에 도착해서 새 안경을 맞춰 쓰는 에피소드를 볼 때까지도, 나는 그레고리우스의 이 일탈이 소박하면서도 어딘가 근사한 곳에 도달할 것이라는 기대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이 계속 진행되면서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그 불편한 느낌은 처음에는 사소한 징조였다가, 점점 도드라지다가, 소설의 후반부에 드러서는 거리낌 없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내가 기대했던 모든 것을 모조리 전복시키며 산산조각 내버렸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징조는 그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가 리스본으로 향할 때 손에 들고 있던 그것. 오래된 가죽 냄새와 먼지 냄새가 기분 좋게 풍기던 에스파냐 책방에서 들고나온 그것.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제목의, 아마데우 이나시우 드 알메이다 프라두가 쓴 바로 그 책.


그것은 처음에는, 리스본으로 향하는 여행의 들뜬 분위기를 기분 좋게 가라앉혀 줄 적절한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리스본에 도착해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그것을 꺼내어 읽을 때도, 나는 그것이 '문두스' 그레고리우스라는 사람의 조금 진지한 캐릭터성 때문일 것이라고 여겼다.


텍스트를 위한 걸음


그러나, 아마데우라는 사람이 썼다는 그 책과, 그 책의 내용과 별다를 바 없는 그가 남긴 편지 등의 '텍스트'들은 점점 소설의 서사에 지나치게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서사 자체를 전복시키고, 모든 것을 그 텍스트의 노예로 만들어버리기에 이르렀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쓴 글을 숨도 쉬지 않고 읽었다.

-p266


'나머지'의 자기 자신을 찾아 리스본으로 향한 그레고리우스는 밝혀지지 않는 이유로 프라두, 즉 아마데우의 글에 '별안간' 광적으로 빠져든다.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 여행은 그저 아마데우라는 사람이 남겼다는 그 텍스트들을 수집하고 그곳에서 허우적거리며 헤엄치는 것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소설의 중반부터 리스본에 도착해 새로운 안경을 쓴 그레고리우스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프라두가 남긴 글을 찾아다니며 프라두가 썼다는 그 텍스트들이 독자들에게 '노출'되기 위해 서사적 알리바이 만들기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꼭두각시 하나뿐이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스를 조사(자료수집형 서사를 가진 소설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몇십 년 간 숨겨왔던 아마데우의 '텍스트'를 그레고리우스라면 잘 읽어줄 것 같다(그 잘 읽어준다는 것의 의미가 뭔지 모르겠지만)는 뉘앙스로 주고, 그레고리우스는 그걸 굳이 또 이상한 장소에 가서 분위기를 내며 읽는다.


특히 후반부에는 난잡하고 성의 없이 그의 동선을 마음대로 정해버리는데, 왜 그들을 만나러 가는지, 일정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같은 것에 대한 고민이 없이 그저 아드리아나를 만났다, 조르주를 만나러 갔다는 서술 하나로 퉁쳐버린다.


두서없고 무책임한 이러한 동선은 당연히 작가가 자신의 철학적 페르소나로 여겨지는 아마데우의 텍스트를 독자에게 노출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최소한의 성의 없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그레고리우스가 누군가를 찾아갈 때마다 그들은 서랍장이나 숨겨둔 상자에 꼭꼭 넣어 보관 중이던 아마데우의 편지나 글을 그에게 건넨다. 이러한 장면은 진절머리 나도록 노골적으로 반복되는데,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 등장한 마리아 주앙마저도 똑같은 행동을 하며 아마데우의 글을 그레고리우스에게 전달하자, 나는 카운트를 포기하고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앞장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부엌장의 제일 위 서랍에서 니스를 칠한 편평하고도 커다란 나무 상자를 꺼냈다. 뚜껑은 상감 세공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식탁에 앉았다.

"그가 우리 부엌에서 글을 쓴 게 몇 개 있어요.....


그녀가 조각이 된 상자의 자물쇠를 열고 제일 위에 있던 종이 세 장을 꺼냈다. 그러고 몇 줄 읽고 나서 그레고리우스에게 밀어 주었다.

-p476


그러니까, 인물들의 이런 작위적으로 반복되는 행동들은 작가의 어떤 철학적 사유를 소설적 융화 없이 거의 그대로 노출시키려는 작가의 노골적인 의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텍스트들은 많은 경우 노출되는 순간의 상황이나 인물들의 서사적 역할과 큰 연관 없이 작가의 철학 노트 그 자체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결국 이 소설의 매력 없는 점은 작가의 추상적인 철학적 사유들을 사건이나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자연스러운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서'의 방식 그 자체로 자신의 사유를 직접 발화하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을 가리기 위한(가리려는 목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의 알리바이로 아마데우의 텍스트를 지속해서 '형편 좋게' 그레고리우스가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획득하여 읽는 식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이라기보단 철학 강의에 더 가까운 방식이며, 그저 소설의 형식을 의태하고 있을 뿐인 에세이적 욕망의 글이다.


굴려 먹는 사탕


그렇다면 '철학서'로서 본 이 소설의 사유(그것이 아마데우의 것인지 작가의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는 그 자체로서의 매력이 있을까. 일단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에는 몇 가지 장애가 있다.


1. 그 텍스트가 등장하는 상황의 인물들과 어울리지 않고 맥락 없이 던져지는 화두(그렇다고 상황과 노골적으로 맞는 사유들만 등장해도 촌스럽겠지만).            

2. 아마도 번역적인 문제라 생각되는 비유와 표현.            

3. 압축적인 사유임에도 하나의 연속적인 철학서가 아니라 타인의 아이디어 노트 기록처럼 분절적이라는 것.            

그런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사유를 난폭하게 종합해 보자면, 결국 이것은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거의 시간과 타인의 시선 등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러나 이러한 '구호'들은 그것의 당연함 만큼이나 특별하지 않다. 온갖 자기계발서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상식적인 구호.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 이 상식적인 구호가 특별한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소설적 사건이었다. 의미 있고 매력적인 사건 하나는 가장 닳고 닳은 고전적인 구호조차도 깊은 울림을 가지고 다가올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는 그 사건을 외면한 채 자신의 직접적인 발화를 위한 무성의한 발판으로 써버리고 말았다. 인물과 배경, 사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져야 할 감정이나 의미는 독자들에게 맡기지도 않은 채 작가 본인이 스스로 '철저하게' 분석해서 친절하게 '강의'해버리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설명되는 그 철학적 사유는 어디론가 날카로운 지점으로 뻗어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 내에서 끊임없이 특별하다고 '강조'될 뿐 한 번도 그 특별함을 직접 보여준 적 없이 아드리아나와 바르톨로메우 신부의 수식으로만 미화되는 아마데우처럼, 여러 가지 비유와 수식 사이를 맴돌며 데굴데굴 같은 곳을 굴러갈 뿐이다. 입안에서 녹여먹는 사탕처럼. 녹아 없어질 때까지 일관된 맛을 내는.


소설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그리하여 어디에 도달하게 된 것일까. 피니스테레에? 그곳에서 어부들과 함께 힘껏 웃는 그레고리우스의 모습은 연속성 없이(아마데우의 철학 수업을 준비하는 조교 역할만 충실히 수행했기에) 너무 갑작스러웠고, 그저 기시감이 느껴질 뿐인 도착점이었다.


그렇다면 베른일까? 출발점으로 돌아와 자신이 일생을 보낸 곳을 새로운 리스본인 것처럼 낯설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그의 모습은, 낯선 포르투갈 단어를 듣고 훌쩍 열차에 몸을 싣던 그 소설의 시작점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나는 그가 여전히 그가 리스본행 열차에 막 올라탄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가는 창밖으로 본 것은 스스로 생산해 내는 수많은 잠언들과 그것들의 집요한 활용. 사유는 여전히 제자리에, 처음과 같은 맛을 내면서 있었다.


그것이 내가 사탕을 싫어하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좋아하는 장면은 소설의 거의 마지막, 열차 객실 안에서 낯선 여자와 밤과 공간을 공유하는 부분. 일상의 안락한 침실을 떠나 딱딱한 의자 위에서 불편하게 보내는 그 밤의 느낌을 좋아한다. 푹 잠들 수 없기 때문에 드문드문 깨어, 깊고 포근한 '밤'을 본의 아니게 느낄 수 있는 순간. 그리고 그곳에 혼자가 아니라, 눈을 뜬, 때론 잠들어 있는 누군가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함께 있다는 것.



기억나는 음식은 주앙 에사가 권하는 뜨거운 차. '메시지'에 집중하는 소설이나 영화는 음식에 소홀하다는 내 이론에 따라 이 소설엔 먹거리가 그다지 나오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이 차는 그 '뜨거움'이 온전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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