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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디맨 Mar 05. 2019

와이프는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해!

영화 《더 와이프》를 보는 색다른 시선

왜 알바는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해?

어느 CF에서 쌈디가 했던 말이다.

'왜'라는 의문사가 포함됨으로써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즉, 알바도 직업이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나는 '왜'라는 의문부사를 뺌으로서 평서문으로 바꾸었다.

그렇다! 나는 '와이프'는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메인 포스터


감정선을 따라 미묘하게 변화하는 글렌 클로즈(조안 역)의 내면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간결한 시놉시스 - 물론 반전은 있다 - 에 플롯 설정도 범하기 이를 데 없고 런닝타임도 100분으로 매우 짧다. 더구나 동명 소설인 원작을 읽지는 않았기 때문에 한 번의 영화관람만으로 제대로 된 감상평을 쓸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라는 주제는 여전히 나를 사색의 숲으로 이끌어 내고야 만다.




60~70세 쯤 되어보이는 부부의 침실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남편 조셉(조나단 프라이스 분)은 저명한 작가이며 노벨문학상 후보이다. 발표를 하루 앞두고 수상 소식을 기다리며 부부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맞고 있다. 긴장감을 달래려는 듯 남편 조셉은 로맨틱한 멘트를 구사하며 아내 조안(글렌 클로즈 분)에게 섹스를 시도한다. 오글거림을 참지 못한 조안의 파안대소로 결국 섹스는 무위로 돌아가지만 왠지 노부부의 정겹고 건강한 부부생활이 부각되도록 묘사한듯한 그런 장면이다.

이른 아침 한 통의 전화는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이야기 전개는 노벨상을 받기 위해 스웨덴으로 날아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 신 분은 읽지 말아주세요.




그러나 그렇게도 이상적으로만 보이던 부부 사이에는 말 못할 비밀이 있었다.


사실 수상한 작품은 아내인 조안이 쓴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결혼 전부터 조안은 조셉의 대리작가 노릇을 해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슬먼 가(家)는 미국사회에 정착한 중산층 유대인 가정이며 작가 집안이다. 그러나 조셉 캐슬먼(조나단 프라이스 분)은 교단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지만 실상 문학적 재능은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조안은 그가 가르치던 제자 중 한 명으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기가 많은 조셉은 조안에게 아기를 잠깐 봐달라는 등의 부탁을 하며 친밀도를 높혀갔고 급기야 아내와 이혼 한 후 조안을 후처로 맞기에 이르른다. 조셉을 많이 사랑했던 조안은 그녀 스스로가 여류작가가 되려하기 보다는 남편인 조셉을 훌륭한 작가로 만들고 싶은 열망을 가지게 된다.


자녀 양육을 비롯한 여러 가지 희생을 무릅쓰며 남편의 소설의 대필에만 몰두한다. 그러한 그녀의 노력이 30년 후 노벨문학상 수상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2류 전기작나다니엘(크리스찬 슬레이터 분)은 노벨상 시상식장까지 두 부부를 따라다니며 비밀을 캐내려고 안간 힘을 쓴다. 나다니엘의 농간 때문에 아들인 제임스에게 비밀이 탄로나고 - 물론 조안은 끝까지 부정한다 -  부부 사이에는 잠시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노벨상 시상식은 무사히 마친다. 그러나 시상식 직 후 조셉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만다.


아내 조안은 끝끝내 그 비밀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로 남편의 영예(?)를 지켜 준다.




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조안 아처라는 여자의 입장에서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c 중반의 미국사회는 여전히 남녀차별이 심했었고, 한국과 같은 유교적 전통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상당히 보수적인 유대인 가정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기저에 깔고 있다. 조안의 학생시절, 그녀는 어느 여류작가의 입을 통해 '어차피 여자는 인정받을 수 없으니 작가가 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인생의 지침하달받는다.

자신의 꿈을 접는 대신 남편을 성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한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는 아쉬움과 억울함과 그리고 여전히 꿈틀대는 자신 속의 욕망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일련의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일반적인 와이프(아내) - House Keeper로서의 역할이 강조된 - 로서의 입장이다.


유독 남성화 정도가 심하고 가부장적 권위에 눌려 있는 한국사회는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시 미국사회의 분위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 보인다. 와이프(아내)는 남편을 뒷바라지 하고 남편의 성공에 내조하는 부수적인 역할이라고 보는 시각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러한 사회적 역할론 속에서 과연 와이프(아내)는 만족할 수 있는가? 혹은 남편이라는 존재는 어떠한 자세로 대응하며 보은을 하는가? 라는 의문를 던지며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이 또한 있을 수 있겠다.


소설 원작자는 아마도 첫 번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시대적인 배경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막은 것이 비단 그러한 사회적 환경이나 주변 인물들 만이라고 보기에는 억지스러운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스웨덴 국왕이 조안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서슴없이 '킹메이커'라고 대답을 했고, 국왕은 왕비를 가리키며 "왕비와 비슷한 역할이겠네요"라며 마무리를 짓는다.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은 어쩌면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 여성의 사회진출에 애로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여성의 직업에 대한 암시가 여러 번 나온다.


안이 우연히 조셉의 전처의 안부를 듣게 되는 장면이 있다. 극의 흐름 상 그닥 중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굳이 전처가 유능한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거나, 그녀가 돌봐주던 전처의 어린 딸은 치과의사로 성장했다는 식의 대사를 집어 넣었다. 사회적 제약은 극복될 수도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킹메이커'가 되기를 희망한 듯 보인다.


이것을 대전제로 놓고 영화를 되짚어 보자.



조안은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 명망있는 여류작가가 되기보다는 남편 조셉을 훌륭한 작가로 만들기로 맘 먹었다. 조셉이 준 '사랑의 호두' - 바람둥이인 그가 여자를 꼬실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 - 에 반한 순진한 아가씨가 아니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라고 성취욕 또는 소유욕을 자극하는 조셉의 제안(?)에 더 매료되었었다는 가설이 설득력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조셉의 아이를 돌봐주러 간 집에서 연애시절 아내에 주었음직한 '사랑의 호두'를 발견하였고, 그것이 자신에게 사랑 고백한 것과 동일한 수법임을 알아챘으나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조자의 길을 택했고 그것은 곧 결혼이다. 훗날 전처인 롤리(?)에게 '자기 남편을 처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


아이들 양육보다는 남편의 작품 대필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남편의 건강, 옷 매무새, 습관, 심지어 말투와 표정까지 세세한 지도를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결혼 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남편의 바람끼마저 묵인해준다. - 영화는 조안의 입을 통해 3번째 가정부와 바람났던 사실을 알려주었고 노벨상 수상하러간 자리에서도 젊은 여성에게 수작을 거는 조셉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결국 작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노벨문학상을 받게 하기에 이르른다. 어쩌면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성취의 기쁨은 잠시, 그녀의 마음 속에는 부정적인 감정을 포함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낀다. 수상 소감을 연습하는 조셉에게 자신(조안)에 대한 언급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남편의 뒷바라지 하며 일생 헌신만 해 온 여자 비춰지는 것이 싫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조셉은 수상 연설에서 짧게 한 문장만 하겠다던 그녀에 대한 찬사를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다. 찬사가 길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은 점차 굳어지고 결국 분노에 차서 시상식장을 뛰쳐 나온다.

호텔로 돌아온 부부는 한 바탕 말싸움을 벌인다. 조셉 때문에 자신을 희생(?)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에 울분을 터뜨리며 모든 영예는 자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의외로 남편 조셉은 자 역시 희생했노라고 말한다. 아내 대신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일을 하고, 나름 작품에도 기여했다고 하는 식이다. 아내는 기획과 편집만 했을 뿐이고 일부는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이다. 또한 결혼 덕분에 중류층 집안에서 호사를 누리지 않았느냐고 반박한다. 연애시절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라는 말로 암묵적인 제안을 던진 의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정녕 그녀의 꿈이 '킹메이커'라면 만족스러워야 한다.

남편이 킹(?)이 되는 순간, 그녀는 행복했었어야만 한다.


이 말은 내조자로서 만족하지 못했던 와이프(아내)를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 그것은 정당하지 않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꿈을 위해서 사는 존재'라는 점이다. 비록 조안 아처만큼 천부적인 능력은 아닐지라도 모든 여성을 포함한 인간은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재능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당연한 것이다.


물론 우리네 삶은 모든 노력을 오직 자아실현에만 한정하도허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결혼이라는 굴레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엄청난 량의 희생과 노력을 요구한다.


와이프(아내)라는 역할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남편이라는 역할 또한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삶을 영위하는 동안, 일정 기한  감내해야 할 '납세의무' 같은 것이다. 결코 목표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만연한 현시대에는 돈을 버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강하지만 기실 '직업'이란 자아실현의 의미가 더 강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와이프'는 직업이 아다. - 물론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결혼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이 아니냐라는 주장이 나올 법하다. 물론 결혼은 또 다른 의미에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본인의 다른 영화평 '리칸 뷰티 https://brunch.co.kr/@duddyman/46 '에 일부 그런 생각을 서술한 바 있다.


어쨌든 결론은 모두가 각자의 자아실현을 위해 일생을 달려가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이며, 결혼이라는 굴레 - 스스로 선택하는 - 속에서 잠시 저항을 받기도 하겠지만 이를 잘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히려 그 굴레 속에서 자아성찰을 이루어 본연의 길에 더욱 정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혼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조안은 자신의 글감메모 노트를 펼쳐든다. 남편의 이름으로 출간되었을 여러 소설의 모티브가 기록되어 있는 그 노트를 말이다. 새로운 빈 페이지를 펼쳐든 그녀의 눈빛은 생기로 가득 차 오른다.


이 엔딩씬은 마치 본연의 길을 이제서나마 걸어가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듯 느껴졌다. 그렇게 원하고 또 추구했던 킹메이커, '와이프'가 아니라 조안 자신의 모습을 찾아나가는 시발점이다.


지난한 역경의 길을 무사히 건너온 모든 아내와 남편들에게 노벨상 수상에 못지 않은 찬사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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