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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영 Sep 30. 2023

4. 아카데미(1)

- 베베의 운명을 보고하지 않은 사실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마야의 이 확신은 정확히 칠 일만에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첫날, 환영식에서 별들 몫의 가스와 암석을 다 먹은 베베가 거신 몫의 루카까지 먹어 치운 것이 그 시작이었다. 아직 먹는 것에 분별이 없는 어린 별이 루카를 먹는 일이야, 가끔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는 것이었다. 별을 말리라는 교수들의 호통에 마야가 온 힘을 다해 베베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베베의 식욕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 선배들의 도움으로 겨우 베베를 식탁에서 떼어 내 빈 교실에 가두는 데 성공했지만, 첫날부터 둘은 골칫덩어리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아카데미 기숙사는 두 거신과 두 별이 방 하나를 썼는데, 기숙사를 배정받을 때에도 문제가 터졌다. 환영식에서 베베가 어떤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본 룸메이트가 베베와는 방을 쓰고 싶지 않다고 요청했는데, 그 말을 알아들은 베베가 냅다 그를 밀쳐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 누구도 마야와 기숙사를 쓰려 하지 않았고, 결국 둘은 그날 밤도 빈 교실에 격리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신입생 하나가 마야와 방을 같이 쓰겠다고 나서주었고, 덕분에 마야는 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필 그 신입생은 마야를 거절한 푸른 별의 주인이었다. 신입생의 이름은 오피디아였고, 별은 랑이었다.


“우리랑 방 같이 써준다고 해서 고마워. 나는 마야고, 얘는 베베야.”


“그 단발머리로 보건대 너, 제 4 하우스 출신이지?”


마야의 인사를 무시하며 오피디아가 물었다.


“그 하우스는 가장 워커다운 워커를 배출한다고 들었어. 그런데 널 보니 의문이 든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피디아의 비웃는 듯한 말투에 마야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별의 모든 행동은 주인이 책임져야 하는 거야. 그런데 네 별이 벌인 일들을 보면 알만하지. 아스텔라가 끝났는데, 저 별은 여전히 길들지 않은 것 같거든.”


오피디아가 베베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베베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침대 모서리를 갉아 먹고 있었다. 마야가 놀라 베베를 떼어내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물론 마야도 오피디아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억울했다. ‘얘는 우주를 멸망시킬 운명이라는데 내가 어떻게 감당하냐고!’ 마야는 당장이라도 그렇게 외치며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고, 오피디아는 대답이 없는 마야를 지나쳐 랑과 함께 침대로 올라갔다. 그들을 바라보던 마야도 베베를 안고는 심란한 마음을 떨쳐내려 노력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쾅!


다음 날, 마야는 굉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온 마야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세상에......"


굉음의 정체를 발견한 마야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베베가 무엇인가를 터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야는 떨리는 손으로 형체를 잃어버린 물체를 집어 올렸다. 다름 아닌 오피디아의 교과서들이었다. 돌을 잘게 쪼개어 만든 종이로 엮은 책들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수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피디아와 랑은 자리에 없었다. 마야가 정신을 차리고 베베를 붙잡은 찰나, 베베가 오피디아의 마지막 교과서를 터뜨렸다.


“베베!”


마야가 크게 소리쳤지만 베베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이 책은 정말 중요한 거야! 여분도 없는데……. 오피디아가 돌아오면 분명 엄청 화를 낼 거란 말이야!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마야의 타박에도 베베는 가만히 서서 중력을 이용해 오피디아의 교과서 조각들을 밀쳐냈다.


“너 혹시 오피디아가 마음에 안 들어? 어제 우리한테 뭐라고 해서?”


베베는 대답이 없었지만, 그게 정답이라는 걸 마야는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교과서를 터뜨리다니……. 차라리 갉아먹었으면 몰라, 이렇게 해버리면 그 똑똑한 애가 네 위험성을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마야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마야의 시야의 자신의 책이 들어왔다. 마야는 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그 앞으로 나아갔다. <우주학 기초>, <별의 구조>, <암석의 기초>, <어린 거신을 위한 환상학>, <루카 생성 기초론> 정확히 다섯 권이 아무 흠집도 없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마야는 책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교과서를 잃어버렸다고요? 전부?”


“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교수가 마야를 내려다보았다.


“그것 참……, 기가 막히는군요. 그냥 자리에나 앉으세요.”


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야는 속상했지만 더 밉보이고 싶지 않아서 교수의 말대로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마야의 자리는 뒤쪽 편이었기 때문에 마야는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로 걸어가야 했다.


자리에 도착한 마야는 옆자리를 확인했다. 오피디아와 랑이 앉아 있었다. 놀라운 것도 없었다. 마야가 생각하기에 이미 자신의 아카데미 생활은 단단히 꼬여 버렸으므로 마야는 그냥 모든 걸 체념했다. 다른 쪽 구석에서 같은 하우스 출신인 디어와 슈메트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야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야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많은 거신이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마야와 같은 4 하우스 출신들은 더욱 그랬다. 하우스의 유모장이 어떤 성향이냐에 따라 하우스의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4 하우스의 미덕은 다정함과 성실함, 그리고 평범함이었다. 마야는 작게 한숨을 쉬고 곁눈질로 오피디아를 슬쩍 보았다. 큰 키와 땋은 머리를 보건대 제 3 하우스 출신이 틀림없었다. 3 하우스는 규칙과 규율이 많은 엄격한 곳으로, 아이들을 자유롭게 양육한다고 알려진 제 2 하우스와는 정반대인 곳이었다. 2 하우스까지 떠올리자, 마야는 문득 같은 반에 제 1 하우스 출신들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들은 다른 하우스에서 선별 된 엘리트들이었고, 아스텔라에 참가하는 인원이 다른 하우스에 비해 아주 적었기 때문에 아카데미 내에서 찾아보기 드물었다.


‘생각해 보니, 대여섯 살 때쯤에 우리 하우스에서도 몇 명이 1 하우스로 뽑혀 갔었던 것 같아. 걔네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마야가 시선을 책상 위로 옮기며 생각했다. 텅 빈 책상을 본 마야는 또 다시 침울해졌다. 마야는 자신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 생각에 빠진 이유가 교과서가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용기를 내 오피디아를 불렀다.


“저기, 오피디아. 혹시 교과서 같이 봐도 될까?”


“안 돼.”


오피디아가 냉정하게 거절했다. 마야는 속이 상했지만, 다시 한번 부탁했다.


"수업이 곧 시작할 것 같아서 그래. 부탁할게."


“싫어. 교과서를 잃어버린 건 네 잘못이잖아. 난 수업들어야 하니까 말 걸지 마. 정신 사나워.”


오피디아는 칠판에서 눈도 때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마야의 삶에서 이렇게까지 못되게 거절하는 거신은 없었으므로 마야는 부탁하는 걸 포기하고 칠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수업에 대해서는 모두 얘기했고, 오늘은 암석의 기초 첫 시간입니다. 여러분 모두 교과서 첫 단원을 펼쳐주세요.”


교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수업을 시작했다. 마야에게 타박하는 투로 얘기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교수의 말에 신입생들이 일제히 교과서를 착 하고 펼쳤다.


“이 우주에는 별과 암석이 있습니다. 요람에서 올려다보면 두 가지 다 반짝이고 있지만, 그 가치는 완전히 다르지요. 이건 여러분도 모두 하우스에서 배웠을 겁니다. 그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확하게 이야기 해줄 학생이 있나요?”


교수의 질문에 마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마야에겐 쉬운 문제였고, 마야는 이런 식으로라도 명예를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교수는 눈을 굴리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내 생각에 마야 학생은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자기 별을 관리하는 것부터 익히는 게 좋겠군요.”


교수의 말에 마야가 의아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베베가 밖에서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기겁한 마야가 밖으로 나가려하자, 교수는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마야에게 소리쳤다.


“여긴 아카데미입니다. 하우스와는 달라요. 수업 중에 멋대로 나가다니 그런 무례가 어디 있죠?”


“하지만 별이…….”


“그런 건 수업이 끝나고나서 해결하도록 해요.”


교수의 말에 학생들이 작게 수군거렸다. 마야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다시 책상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 그럼 다시. 아까 질문에 답할 학생이 있나요?”


“저요.”


“그래요, 오피디아가 대답해 보죠.”


“네, 교수님. 별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 냅니다. 루카라고 부르는 이 에너지 덕분에 열과 빛을 내지요. 그러나 암석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암석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별빛을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암석은 크기가 어떠하든 간에 가스와 마찬가지로 별의 먹이로서의 가치만 있습니다. 별의 중력에 완전히 이끌리지 않고 공전하는 암석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큰 의미는 없습니다.”


“좋아요, 잘 대답했어요. 별이 다 자라면 사실 그마저도 쓸모가 없죠. 그래서 종종 어떤 워커들은 별을 경영하면서 루카를 요람에 보낼 때 암석도 같이 보내곤 하죠. 그럼 여러분의 별들처럼 자라나야 할 어린 별들이 그 암석을 먹게 되고요. 자, 이번엔 암석의 성분에 관해서 얘기해 보죠. 우선은…….”


교수가 뒤로 돌아서서 칠판에 여러 기호를 썼다. 그러나 마야는 집중할 수 없었다. 가치가 있는 별과 가치가 없는 암석. 오피디아를 비롯해 대부분의 학생들은 별과 같이 가치 있는 워커가 될 것이다.


'난 어쩌면 암석 같은 존재인 게 아닐까. 빛이 나는 게 아니라 빛을 반사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돌맹이들 말이야.'


그러자 모든 게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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