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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개의 달 Jan 06. 2019

손으로 쓴 마음

편지

           

 편지를 좋아한다. 꼭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생각하며 쓰는 편지에는 준비하는 순간부터 보낼 때까지 가득 마음이 들어간다. 어릴 때는 편지지 묶음을 사 두어야 할 정도로 자주 썼는데. 수단이 많아지고 편리해질수록 번거로운 것들은 점차 순서에서 밀려나간다. 그래도 손편지를 굳이 쓰는 이유를 꼽으라하면 역시 설렘이겠다. 카톡 미리보기 같은 것으로는 도무지 느낄 수 없는. 봉투를 열어보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설렘 같은 것. 보내는 사람은 도착할 때까지 잘 갔다는 소식을 마냥 기다리고, 받는 사람은 올 때까지 우편함을 열어보며 시간을 세게 되는 것. 물론 요즘은 이마저도 누가 보냈다고 툭 카톡으로 알려주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확한 주소를 적고 소정의 비용을 지불하면 어디든 소식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편지지를 꺼내들게 한다.

 모아온 편지상자 안에는 참 많은 목적이 들어있다. 가장 흔한 안부부터 축하. 감사. 위로와 응원. 사과. 얼굴 보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고백과 절절한 애정까지. 내 상자 안에 든 것은 받은 편지와 보내지 못한 편지뿐이니, 그걸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하는 것이 전부다. 가끔은 그 안에서 전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름을 찾아내기도 한다. 누군지 아무리 머리를 더듬어 보아도 까무룩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이에게 고맙고 즐거웠다니 대체 누굴까. 도저히 기억해낼 수 없지만 어느 순간의 행복을 빚진 사람일 테지. 편지에는 끝내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도 한가득 들어있다.      


우리 앞으로도 우정 영원히.

평생 너만 사랑할거야.

너 이거 아무한테도 말 안한다고 약속해.     


 끝내 우리는 서로 이름도 잊은 채 지내게 되고. 사랑은 겨울보다 더 찬 결말을 맞이하며, 신뢰는 유리처럼 깨져버렸지만 적어도 그때 그 순간에 우리는 모두 진심이었겠지. 꾹꾹 눌러써서 뒷면에 올록볼록 배긴 글자들을 손으로 더듬어보며 영원과 평생을 믿었던 어느 순간을 생각한다. 아마 모두에게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는 지금도. 

 보내지 못한 편지는 사람을 잃거나 시간을 잃는다. 미처 가지고 가지 못해서 끝내 보낼 수 없던 편지. 다 써두었는데 그 사람이 더 이상 편지 속의 사람이 아니라서 보낼 수 없던 편지. 가끔은 주소를 잃은 것도 있다. 이제는 그곳에 살지 않는 당신 앞으로 갔다가 되돌아오거나, 숫자가 하나 둘 달라져서 아예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편지. 개중 어떤 녀석들은 운 좋게 반송되어 다시 제 갈 길을 찾기도 한다. 내가 살면서 받은 몇 장의 반송편지들은 친절한 이들의 수고 덕에 무사히 태어난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사 온 새 집 우편함에 이전에 살던 이에게 보내는 편지가 와있거나, 길을 잃은 편지가 들어오면 돈을 들여서라도 다시 왔던 곳으로 보내주려 노력한다. 그 안에 든 마음이 원래 가야 할 곳에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오늘은 얼마 전 친구가 된 E를 떠올리며 편지를 쓴다. 이왕 쓰는 것 좋은 곳에 적고 싶어서 아끼는 종이를 꺼내 모양을 다듬고, E와 어울리는 색의 잉크를 골랐다. 보랏빛 우아함과 푸른 눈물을 다 가진 E에게는 역시 청보라색이 좋겠지. 자주 꺼내주지 않아 뻑뻑해진 만년필에 잉크를 넣고 사각사각 종이를 긁으며 편지를 쓴다. 악필에게 두 장의 편지지를 쭉 채우는 것은 영 버거운 일이다. 글씨가 무너지면 좀 쉬고, 문장이 막히면 또 쉬어가며 편지를 쓴다. 이 겨울을 넉넉히 보낼 만큼 따듯한 위로를 쓰고 싶었는데, 결국 써놓고 보니 그냥 내 이야기만 줄줄 한 것 같지만. 으레 편지란 그런 것이라 생각하며 마침표를 찍었다. 편지가 낯선 곳에서 길 잃지 않도록 주소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옮겨 적고, 끝내 봉투를 붙였다. 이 안에는 별다른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걸로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이 박제로 남을 것이다. 상자 속의 수많은 편지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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