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때엔

(25.2.하순)진리를 말해야 할 ‘때’에 대한 한 가지 생각.

by 제II제이

스포. 이 글에는 일종의 나의 신앙고백이 담겨있다.




살다 보면,

때로 뉴스를 볼 때,

때로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

때때로 겪는 다양한 일들 앞에 섰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때가 있다.


최근 만났던 상황들만 해도,

몇 가지만 생각해 본다고 해도.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헤매며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

혹은 세상 때문이라며

치미는 분노에 휩싸인 어떤 이에게,


시험에 연거푸 불합격하고

또다시 도전한 시험에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또 불합격할까 봐

잔뜩 긴장한 어떤 이에게,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가

갑자기 발견된 질병 때문에

생사의 경험을 하고 온

오랜만에 만난 어떤 이에게,


배우자나 부모님, 혹은 자녀나 형제 등

가족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답답한 마음에

눈물짓는 어떤 이에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되는 곳으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음을 보며

그래서 무너질지도 모르는

자신과 주변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무너진 일상에 번민하는 어떤 이에게.


그 속내를 서로 모르는 채로

오래된 칼국수 집에 함께 앉아

칼국수와 만둣국을 맛보며 식사를 하거나,

부드러운 재즈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향기로운 차를 마시거나,

우리 집에 아이들과 함께

하룻밤 자러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낼 때.


서로 속 모르고 나눌 수 있는 말들은

너무나도 많을 테지만.


이야기가 오가며 점점 열리는

마음길 따라가며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을

어떤 뜨거우면서도 서늘한 것,

잠잠한가 싶으면서도 요동치는,

잊었다 싶으면서도

어느 순간 생생하게 살아나 나를 사로잡는,

누구나 하나 둘씩은

다들 가지고 있지만

각자가 가진 것이 전부 다 다른 그것.


진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것에까지 이야기가 깊어져서

그것이 식탁이나 티테이블 위,

침대 머리맡에,

이동하며 같이 타고 가는 차 핸들 앞으로

놓여질 때,

어쩔 수 없이 함께 그것을 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적당한 위로의 말 같은 것은

꺼내고 싶지 않은,

그래서

너무나도 잘 말해야만 할 것 같아

속으로 말들을 고르고 골라보려 하지만,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때가 있다.


세상의 수많은 노래들 중

마음을 울리며 공감되는 가사가

흘러나올 때

그런 가사들을 통해

자기 상처가 확인되고 정면으로 보여서

그것이 더 큰 아픔으로

재확인되는 것은 아닐지,


주변에서 그를 위로한답시고

즉석에서 금세 떠오른 해결책들을

하나둘씩 꺼내 전달할 때마다,

오히려 그 설익은 조언을 듣는

아픈 사람이

‘어떤 자세한 이유와 과정과 사정들 때문에

그런 해결책으로 해결할 수 없는지’에 대해

변명하듯 설명을 해주며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이해시켜야 하고

그러면서 상처가 더 자세히 느껴지는

그런 상황으로 흘러가게 되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걱정과 생각들에 가로막히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여러 문제들을 고민할 때,

보통 누구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할까?

아마도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가까운 친구나 가족들에게

자신이 겪는 어떤 문제나 어려움 자체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지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그 문제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일 것이므로.

자신에게 애정을 가진 친구나 가족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잘해야 잘 들어주는 것까지일 것이다.


때로 어떤 문제들은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전문적 영역의 지식이나 노하우가

필요한 때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듣는 사람이 상담사나 변호사 같이

특정 영역에서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 특정 영역에서만큼은

이성적 감성적으로 필요한 말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각자 모든 영역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나 자신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든.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우리 모두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궁극의 문제를

-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옳음, 선, 이상, 가치,

그리고 죽음과 같은 문제들이다.


순순히 일상을 살아가는 와중에

어느 순간 문득 자기 자신 스스로 떠오른

옳음의 문제, 선의 문제, 가치의 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 앞에 섰을 때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그때 명확히 자신에게 할

그 어떤 말을 나는 가지고 있을까.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온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그런 ‘말’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지금까지의 나의 삶이

평탄하기만 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많이 굴곡진 삶이었느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나는

삶의 진짜 쓴 맛을

맛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을 미리 말해 두고서,

위의 질문에 대한

현재까지의 나의 생각은 이렇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내 경험, 상대의 경험, 우리 모두의 경험을

뛰어넘는 진리의 이야기이다.


그 순간에 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음악은

진리이신 그분에 대한 찬양이다.


결국 진리이신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답이다.

거기에 참된 위로와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들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지 않아도 되는 홀가분함은 덤이다.

그것은 그 말 자체에

근거와 기원을 가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 절대적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나의 말이 아닌 그분의 말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통해

고통이 무화된다거나, 해결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힘든 일을 어떻게 사라지게 하거나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몰랐던 빚 문제가

설령 어찌하여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나에게 상처 준 형제와의 갈등까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질병이

다행히 치료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찾아올 또 다른 병까지

모두 예방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은, 그리고,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시는 바 되지 않으시는 그분의 말씀이

우리 삶을 다루실 수 있다.




이 생각을 여기에 기록해 둔다.

혹 내가 힘들어져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때가

올 수도 있으므로.

아니, 그런 순간이 올 것이므로.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사진출처: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8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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