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작가가 왜 좋냐는 아내의 질문에 대한 대답(2)

(미리 쓴 25년 2월 상순의 순간) 말하자면, 그의 글은 '따뜻'하기에

by 제II제이

(1편에 이어서...)

김연수 작가가 왜 좋냐는 아내의 질문에 대한 대답(1)




2.


아내의 질문에서 촉발된 이 글이

2부까지 갈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쓰다보니 요즘 내가 글쓰기 실습을 하면서

나름대로 정해놓은 글 한편의 분량을

훌쩍 넘기게 되었다.


뭔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글을 쓸 때

역시 글이 좀 더 길게 나온다.

김연수 작가랄지, 아내랄지, 등등등.




각설.


김연수 작가의 책 중에서 내가 처음 산 것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이다.

지금 검색을 해보면

2016년의 문학동네 판본이 나오는데,

이 책의 표지 그림보다는

이전 판의 표지 그림이

일러스트 느낌이 강해

더 책에 대한 내 느낌이 잘 전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대를 휩쓸고 있는 작가였기 때문에

서점에서 샀을 것이다.

제대로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사실은 지금도 좀 그런 면이 있다.


김연수 작가의 어떤 작품들은 좀 어려웠다.

또 어떤 작품들은 정말 재미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작중 상황이 좋지 않다.

실제하는 이 세계가 그렇듯.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닿을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 어떤 것들 앞에서

헤매는 일. 방황하거나 추적하거나.


그러나 그의 글들은 무언가 밝은 전망을,

그렇지만 마냥 대단히 밝지만은 않은,

저기 먼 곳에 비치는 어떤 아름다운, 약한,

그러나 분명한,

그런 어떤 빛의 풍경을 상상하게 해준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인간과 세상, 우주에 대한 절망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이야기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다른 책 <<소설가의 일>>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럼에도, 계속 소설을 써야만 하는 이유>라는 글이 있다.

나는 한동안 이 글을

‘그럼에도, 계속 소설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나도 요즘 ‘마흔’을 지나가고 있는데,

이 글도 ‘불혹’에 대한 재미난 썰로 시작한다.

이어서 그가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된

어떤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다.”(254쪽)
"실패한 인생은 죽음마저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란 말인가?"(255쪽)


작가는 이 세계가 절망적임을,

바로 그것을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 우주는 절망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는 쪽을 선택할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이 좌절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꿈에 대해서 한 번 더 말할 때, 우는 얼굴로 어둠 속에 서서 뭔가 다른 좋은 생각을 하며 억지로 미소 지을 때, 바로 그때 이 우주가 달라진다는 말.”(256쪽)


이 역설에 대해서 그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가쿠레 기리시탄’

(일본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져서

신부가 모두 처형되고,

교회가 사라진 뒤에도,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예언을 믿은 숨은 기독교도인들)에 대한 그 이야기는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울컥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것도 김연수 작가가 해준 이야기라서

더 그럴 것이다.

그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는지는 까지는 알 수 없지만,

관점이 기독교와 비슷한 지점이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아내의 질문으로 시작한 글이 여기까지 오자

나는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문장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대로 인용한다.

이 글은

장편소설인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쓰고 나서

쓴 글이라고 한다.

(물론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 아직은.)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란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261~262쪽)


나는 왜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소설가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의 (어떤) 소설이

(일단) 재미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어떤) 소설이

이 세계와 우주와 인간의 삶에 대해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

그러니까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어떤) 글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이 우주의 현실에 대해

그대로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의 빛,

절대적으로 희미하지만

너무나도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는 그 빛에 대해

잘, 더해서 친절하고 따뜻하게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따뜻한 것이다.

이 글이 아내에게 대답을 하기 위한 글이기 때문에

아내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한 번 더 이야기 해본다.

김연수 작가를 왜 좋아하냐면,

그의 글에서도 어떤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끝)


(인용문의 쪽수는 <<소설가의 일>>의 해당 쪽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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