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3월 상순) 가능성은 언제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글쓰기 실습이나 창작 수업에 종종 발을 담근다.
내가 말을 많이 해야 할 때도 있고,
계속 듣기만 해야 할 때도 있다.
시키는 입장에 서든, 따르는 입장에 서든
글쓰기는 언제나 막막하다.
하얗게 넓은 화면과
깜빡이는 커서는
말 그대로 화면과 커서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무수한 선택의 가능성들을 품고 있는
어떤 것을 향해 열린 문이기도 하다.
글자가 찍히면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커서가
이미 적혀있던 글자를 가린 흰 수정테이프를
다시 긁어내는 막대기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리고는 곧 다시 반대 방향으로 수정테이프를
밀어 덮어버리는 나의 모습.
오른쪽으로 밀려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밀려오는 커서의 진동 운동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막막한
쓰기 실습의 현장에서
덜 힘든 방식으로 손을 풀어보기로 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써보기보다는
이미 쓰인 것을 보며 '다시 쓰기'를 해보는 편이
덜 힘들다.
이미 어느 정도는 현장 검증이 된 방식.
(https://blog.naver.com/younibang/222283151930 를 참조)
제시된 원작 시 두 편 중
<선택의 가능성들>은 더 직관적이고
<나뭇잎>은 좀 더 근원적인 면을 파고든다.
'나'에 대해서 글로 표현하는 실습을 통해
나의 나의 현재와 과거를 생각해 보는 시간.
교실이나 강연장에서만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 어디에서든
한 번쯤 해 볼만한 글쓰기 실습이다.
실습을 시키면서
나도 다시 써봤다.
자신에 대한 글을 쓰다 보면
진짜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나의 모습은 아니지만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
섞여서 표현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분명 들 것이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써야 한다.
고민은 뒤로 넘겨두고
일단 써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썼다 싶으면
그때 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진짜 자신의 모습과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구분해 보자.
상상력을 발휘해
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해 보자.
가까운 지인에게 한 번,
그리고 조금 덜 친한 지인에게 한 번.
그러면 두 가지가 구분될 것이다.
둘 다 '나'에 관한 것임이 분명하기에
굳이 어느 쪽으로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구분해서 알고 있는 것이 좋다.
그러다 보면 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
하루하루는 똑같아 보여도
한 달, 일 년이 지나면
분명히 달라지는 것이 사람이다.
변해가는 나를 보는 일을
종종 해 보는 것은 어떨까?
변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 실은
낡아가는 것이고,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살아있는 것이지 않은가.
아래는 이번에 실습해 본 글이다.
<선택의 가능성들>
(25.3.7.의 제2제이)
연필보다 키보드를 더 좋아한다.
핸들보다 콘솔을 더 좋아한다.
물의 고요함보다는
흐르는 물의 소리를 더 좋아한다.
장미꽃보다 깻잎을 더 좋아한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출근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누가 승용차로 태워주는 것보다
대중교통으로 혼자 퇴근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버스보다 지하철을 더 좋아한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나에 대해서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
헬스장보다는 운동장을 더 좋아한다.
놀아주는 것보다는 같이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배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만드는 것보다는
발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
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을 더 좋아한다.
(마지막 두 줄은 좋아 보여서 원작의 일부를 그대로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