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퇴사일기 01화

퇴사 1일차

퇴사일기 1

by 키르히아이스

어제자로 퇴사했으니 오늘부터가 퇴사 1일이 된다. 원래 2주 정도 휴가를 쓰고 퇴사하려고 했으나 인수인계 때문에 며칠만 쉬는 것으로 했다. 휴가 기간 중인 것과 퇴사일이 지나서 실제 실업자가 된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무거운 책임감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이 함께 내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 길이 시작하는 곳에 지금 나는 서 있다.


퇴사한 회사가 나에게는 세 번째 회사이다. 아주 짧게 다닌 회사들까지 합하면 더 많지만 3년 이상 다닌 회사만 보면 그렇다. 나는 왜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 번이나 퇴사하고 말았을까? 자세한 이유는 뒤에서 말하겠지만 총 10년여 간의 회사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나’라는 사람의 적성은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결론 내렸다.


세 번의 퇴사는 나에게 더 이상의 회사생활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그렇게 결론 내린 근거는 무엇이고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이제부터 설명하려고 한다. 내 개인의 소회야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그 경험 속에서 얻은 깨달음은 이 책의 독자들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글을 썼는데 대략 4년 만의 일이다. 한참 글을 많이 쓰던 때로부터는 10년이 지났다. 나는 원래 글 쓰는 것을 참 좋아한다. 시, 소설, 평론 가리지 않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공대생이었던 대학 시절부터 그랬다. 그러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글쓰기를 점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글 쓰는 것은 물론, 책을 읽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간에 쫓기는 샐러리맨들이 다 그렇지만 나 역시 평온한 저녁 시간은 꿈에 불과했고 사생활이 별로 없었다. 출근하면 일하고 퇴근하면 늘어져 자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잘하던 것들을 하나씩 잃어갔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것이다.


퇴사 1일 차가 되면서 오랜만에 한 것들이 너무 많다. 오늘은 수영 학원에 등록해서 수영 기초를 배우고 왔다. 회사 다니면서 해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으나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퇴근 시간도 일정하지 않은데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 수업을 듣는 것은 무리였다.


오늘은 아침 9시에 수영 수업이 끝나고 시내를 좀 걸었는데 9시가 넘어도 사람 사는 세상이 있었다. 여전히 차가 다니고 사람들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9시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생각도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회사 밖의 세상은 그렇게 나름대로 존재하며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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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은 것도 몇 년 만인 것 같다.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는 회사 지하식당에서 먹었으나 야근이 계속되자 아침에 일찍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아침을 포기했다. 회사생활 10년 동안 아침을 먹은 것은 몇 달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 9시가 훌쩍 넘어 그야말로 브런치를 먹으러 집 앞 식당을 찾았다. 주메뉴는 5천 원짜리 우동이었다. 10시가 되어갈 즈음 식사를 마쳤는데 그제야 한두 명씩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심때 혼자서 먹을 곳이 마땅치 않은 회사 근처 식당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천천히 메뉴를 고르고 최소한 지금 먹은 메뉴가 뭔지는 나중에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맛을 느끼며 먹었다. 가끔 회사 생활하다 보면 점심때 뭘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정도로 샐러리맨이라는 틀 속에 회사형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회사원이란 이유로 우리는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정상적인 삶마저 포기하면서 쫓겨야 할까? 이게 회사원이란 걸까?


퇴사일을 며칠 앞두고 연차를 낸 기간은 더할 나위 없이 바빴다. 노느라고 바쁜 게 아니라 앞으로 할 일들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동안 듣고 싶었던 교육과정들을 신청하고 혼자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 며칠 동안 회사를 벗어나 지내면서 하나 느낀 것이 있다. 하루가 끝나고 나면 여느 때와 달리 굉장히 뿌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제 돈도 못 버는 실업자인데 뭘 보고 뿌듯해할까? 이것은 이유가 있다. 바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목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하루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보냈다. 내 시간을 돈과 바꾸는 게 아니라 시간 자체를 나를 위해 사용한 것이다. 회사에 있을 때는 밤낮없이 일해도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람이 별로 없었다. 나에게는 결정권도 없었고 책임만 무거운 경우가 많아서 더욱 그랬다.


회사에서 보냈던 그 수많은 시간을 나를 위해 투자했다면 작은 것이라도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이제 그 생각을 실천해보니 바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나를 위해 일한 시간은 보람으로 돌아왔다. 매달 감질나게 신경을 마비시키는 월급을 받으며 점점 삶이 피폐해져 갔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생계를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지만 억울하거나 아까운 게 없었다.


회사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다 자정이 넘어 땀에 찌든 구두를 벗으면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이제 그 결정을 내리고 나니 마음은 후련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악착같이 붙잡고 있던 회사라는 동아줄을 놓고 나니 또 다른 길이 보였다.


평일 오전의 낯선 풍경과 저녁에 찾아오는 뿌듯함. 이것이 퇴사 1일 차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이다. 앞으로도 오랜만에 하는 일이 많을 것 같다. 회사 때문에 미뤄왔던 것들, 하다가 멈추었던 것들. 그것들을 다시금 끄집어내 먼지를 털어내고 해 볼 생각이다. 남들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원점으로 돌아간 나는 오늘 새로 태어난 느낌으로 하루를 보냈다. 내일도 새로운 하루가 될 것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고 내 의지로 하루를 보내는 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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