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스킨십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인 사랑과 스킨십(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랑을 분석하겠다는 책이 스킨십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책이 아니다. 도덕과 위선의 탈을 벗고 진짜 스킨십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사랑과 스킨십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것은 참 해묵은 논쟁에 해당한다. 정신적 사랑, 육체적 사랑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끝없는 논쟁이 이어진다. 대개 여성들이 정신적 사랑에 대해 강조하는데 이것은 육체적 사랑이 끝나고 나면 남성이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실제로 남성들이 육체관계 직후 성적 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성욕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욕도 함께 떨어진다. 인터넷에서는 이것을 현자 타임이라고 부른다.
성욕과 다른 욕구의 관계
성욕에는 다른 욕구도 같이 결부되어 있다. 실제로 식욕과 성욕의 관계는 의학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두 가지를 관장하는 신경이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여성은 왜 더 적극적이지 않을까? 식욕이 큰 여성도 성욕 면에서는 다른 여성과 큰 차이가 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좀 새롭게 접근해볼 필요가 있는데 바로 정신적 차원에서 이 현상을 보는 것이다. 욕구라는 것은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3대 욕구는 식욕, 수면욕, 성욕인데 3가지 중 한 가지 욕구가 강렬해지면 나머지 욕구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즉 욕구 충족에 대한 생각이 무의식에서 의식세계로 옮겨오게 된다.
식욕이 끓어오를 때 그것을 채우려고 하다 보니 다른 욕구도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런 것에도 관심이 간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생리학적 접근보다는 심리학적 접근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이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는 합리적 생각이다. 각각 다른 것을 담는 바구니 3개가 있다고 해보자. 한 바구니에는 소금, 한 바구니에는 설탕, 한 바구니에는 후추를 담는다. 어느 날 바구니에 소금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하면 소금을 새로 사야겠다는 욕구가 매우 강렬하게 일어난다. 하나도 없기 때문에 급격한 욕구가 일어난다.
그런데 옆 바구니를 보니 설탕이 1/3쯤 남아있다. 소금이 없는 상황이다 보니 왠지 설탕도 곧 떨어질 것 같다. 소금과 설탕을 채워야 할 필요를 같이 느낀다. 만약 소금이 꽉 차 있었다면 설탕이 1/3 밖에 안 남아도 그렇게 조급한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지만 식욕과 성욕이 단지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연결된다는 이론보다는 훨씬 합리적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성욕을 채우고 난 뒤 소홀해지는 것은 소금을 다 채우고 나니 설탕을 채우는 것에 대해 귀찮아지는 것이다.
프로이트 식으로 해석하자면 인간의 원초적 의지에 해당하는 리비도가 성욕에 관한 것이므로 욕구가 충족되면 리비도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다. 리비도는 성뿐만 아니라 다른 행동에도 근원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따라서 다른 의지도 같이 줄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볼 때 남성들이 육체적 사랑 후 떠날 것이란 불안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여성도 2세에 대한 강렬한 모성애를 가지고 있으므로 성에 대해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임신, 육아 등의 부담이 있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행위 자체가 악수하는 것처럼 간단한 게 아니라 높은 수준의 사생활 공유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신중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반복된 종교적, 도덕적 교육이 작용하여 다른 것에는 아무리 관대한 사람도 성에 대해 관대하기는 어렵다.
통상적으로 남성에게 성적 욕구가 더 강렬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할 것이다. 이것은 지구 상의 대부분 수컷이 마찬가지이다. 여성의 방어적 자세, 남성의 적극적 자세는 두 성간의 충돌을 낳는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관점으로 볼 때 성이 사랑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 속에서 육체적 관계없이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불구가 된 남자를 사랑한 여성의 이야기는 종종 접할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사랑에 성이 필수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에서 성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랑과 성에 관한 남녀의 관점
남성과 여성을 나눠서 생각해보자. 여성에게 사랑과 성이란 어떤 의미일까? 여성에게 성은 비교적 수단적 의미를 가진다. 남성과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성을 허락해야 한다.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사람을 제외하고 사랑은 하면서 성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종교의 영향으로 순결서약 등이 유행하고 실제로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한시적인 것이므로 제외한다.
여성 입장에서 성이란 자발적인 욕구의 차원이 아니라 수단으로써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물론 인간인 이상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 성욕은 남성처럼 능동적이고 전방위적으로 다가오는 압력은 아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여성은 성을 선택, 조절할 수 있으며 가장 높은 단계의 친교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남성에게 성욕은 때로는 성가실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압박해오는 하나의 본능이다. 어떻게 보면 족쇄 같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 남성이 성욕이 귀찮다며 스스로 거세한 일이 있었다. 얼마나 귀찬으면 이런 일을 벌였을까?(출처 : 데일리안, 20150311, "성욕이 귀찮다" 스스로 거세한 남성" http://www.dailian.co.kr/news/view/493140/?pcv=1)
불행하게도 생식기가 없다고 해서 성욕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성불능이 된 많은 노인, 환자들도 성욕은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컷에게 성욕은 가장 강한 본능이다.
만약 성욕이 없다면 남성은 타고난 신체, 호기심, 상상력을 활용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욕이 있기 때문에 능력의 상당 부분을 여기에 소모해야 한다. 그만큼 수컷에게 부여된 중요한 본능이기도 할 것이다.
남성 입장에서는 성이란 표면적으로 수단보다 목적에 가깝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진 다음 여성은 다른 목적이 없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사랑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성이 목적으로 남아있다. 사랑과 성 중에 어떤 것이 더 궁극적인 목적일까?
여기서 정신적 사랑, 육체적 사랑에 관한 논쟁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자주 범하는 실수인 이분법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인간이란 것 자체가 정신과 육체가 함께 있는 동물이다. 한쪽만 가지고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 가지가 더 우월하고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종교적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사랑을 우선하지만 인간도 하나의 생물로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욕구를 없는 것처럼 포장할 수는 없다. 결국 그 욕구 때문에 이 세상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전통적인 관계에서는 정신적 사랑이 이루어진 이후 육체적 사랑이 시작되지만 어떤 경우에는 육체적 사랑이 먼저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육체적 사랑에서 나타난 만족과 기쁨이 정신적 사랑의 에너지로써 다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작용을 일으켜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게 된다.
육체적 사랑만 하는 경우도 있다. 사귀는 관계는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육체적 관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 경우 욕구의 충족 밖에 없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하지 못할 뿐이다. 불륜도 이런 관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격렬하게 미워하는 사람과 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없다.
기본적으로 육체적 사랑도 에너지가 필요하고 정신적인 서포트를 받아야 유지될 수 있다. 육체적 사랑만 가지고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육체적 사랑에서 써버린 에너지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만나는 것이다. 육체적 사랑만 하면서 항상 같이 있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정신적 사랑도 육체적 사랑이라는 기쁨 없이 추상적으로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정신적 사랑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을 유지할까? 이 경우 대게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다. 여성이 정신적 사랑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할 때는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남성에게는 이것이 매우 어려운 결정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욕구를 눌러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이런 남성을 비난할 수도 있지만 뭐가 더 옳은 것은 아니다. 욕구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사랑에서 성의 역할
사랑에서 성이 차지하는 부분은 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중요하다고 볼 수는 있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일 때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은 신체 감각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상대방의 체온과 촉감을 통해 감정의 교류가 더 원활해진다. 인간이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에 하나가 스킨십이다. 남자들은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 어깨동무를 한다. 어머니는 사랑을 전하기 위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백 마디 말보다 더 나은 감정 전달방법이다.
사랑에서 성도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역할이 아닌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욕구 충족의 기능, 감정 전달의 기능, 감정 확인의 기능, 상처 치유의 기능까지 다양하다. 마치 침팬지가 서로의 기생충을 잡아주는 행위처럼 친교의 의미도 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기능도 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가진 놀라운 기능 중 하나가 치유의 기능인데 정신적 사랑뿐만 아니라 육체적 사랑도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확인을 통한 자존감 회복, 긍정적 감정 확산 등 효과가 있다. 욕구 충족에 따른 불안감 해소도 정신건강을 위해 도움을 준다.
사랑을 보는 관점에서 육체적 사랑, 정신적 사랑은 나눠서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을 볼 때 한 가지를 우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균형점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한 가지가 무시되었을 때 나머지 하나도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다. 사랑의 속성이 그렇다. 사랑의 3요소를 정의할 때 사람을 포함시킨 것은 존재의 의미도 있었지만 육체적 사랑의 의미도 있었다.
육체적 사랑이 반드시 성관계를 의미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펜팔만 하면서 두 사람이 사랑했다고 말할 수는 없듯이 두 사람의 육체가 반드시 만나서 서로를 인지하고 느껴야 한다. 동성애 관계에서도 성관계는 없을 수 있고 성이라는 것 자체가 특정 행위를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드물지만 상황에 따라 개인이 육체적 사랑의 의미를 통상의 방식과 다르게 부여할 수 있다. 키스하는 것이 최상의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물론 남성이 동의하는 경우에.)
만약 육체적 사랑 없이 펜팔만 해도 사랑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소설 속의 인물도 사랑할 수 있고 아바타와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 실체는 필요하다. 가끔은 가상의 인물과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 예술 작품 속 인물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감정의 교류가 없어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펜팔은 감정의 교류는 있지만 물리적 실체가 없는 신호의 교환에 불과하므로 사랑이라 말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글을 잘 쓰는 사람이 펜팔을 대신해주었다면 이런 것이 사랑일 수 있겠는가?
자극적이고 즉흥적인 사랑이 만연한 요즈음 육체적 사랑의 의미가 크게 부각되는 면이 있다. 우리가 쌓아놓은 도덕관념이나 철학에 비추어보면 정신적인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돌아가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온전하고 오래가는 사랑을 위해서는 두 가지의 균형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이타적 관점의 배려가 중요하다. 사랑은 인간이란 생물이 자기 존재가 아닌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기특한 행위이다. 이런 이타심이 사랑을 더욱 발전할 수 있게 하고 서로를 타인이 아닌 내 안의 사람으로 인식하게 한다. 사랑은 성이 있을 때 더 빛나고 이타심이 있다면 살아있는 것이 된다.
사랑의 관점에서 성은 피하거나 모른 척할 일이 아니고 사랑의 완성을 위해 우리가 직시하면서 이용해야 할 수단이자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