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 예수의 유언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누가복음 23장 46절)
죽음은 언제나 말의 끝에서 온다. 그 대상은 이미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며 단절을 선언한 신이었다. 예수는 이미 절망한 신에게 육체가 아닌 영혼을 맡긴다. 더 이상 어떤 주장도 의미를 갖지 않을 때, 남은 말은 “부탁합니다”다. 예수는 그 말을 신에게 했다. 이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기도 하다. 곧 육체를 잃는 그가 소멸되지 않을 것으로 믿던 영혼을 신에게 맡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예수를 단순한 도덕 교사가 아니라, 진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예수는 기록되고 구전되던 신을 믿는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기로 선택한 신의 근원을 찾으려고 시도한 사람이었다. 신의 생각을 묵상하고, 신과 대화하고, 그 말의 무게를 직접 견디면서 신을 이해하려고 했던 사람. 이것이 유대인이자, 유대교라는 전통 속에서 살아야 했던 예수가 가진 화두였다.
예수가 찾으려고 했던 것은 믿음이 아닌 진리였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라고 예수는 발언했다. 예수는 신앙인 이전에 자유를 위해 진리를 추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진리는 무겁다. 예수는 그 진리를 혼자 짊어지고 난 후에야 결국 자유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속엔 진리의 내려놓음이 들어 있다. 그는 자기를 내려놓을 줄 알았고, 내려놓는 방법으로 세계와 작별했다. 그리고 자유로워졌다. 자유는 진리조차 포기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이것은 신학의 결론이 아니라, 인생의 결론이었다. 그가 떠돌이가 되었던 이유, 낯선 이들과 함께 식사했던 이유, 율법을 뒤집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이유, 그 결과 희망의 상징도, 조롱의 대상도 되었고 국가와 종교에 이단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진리의 끝에 놓인 자유를 갈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는 모든 경계의 해체를 의미한다. 타인도, 국가도, 역사도, 신도, - 스스로가 맺거나, 어쩔 수 없이 맺어진 모든 관계는 경계다.
“내 영혼을 맡긴다”는 말은 종교적 고백이라기보다는, 신과 자신의 관계를 정리하는 말이다. 그 결론이 가능했던 건 그의 생애 전체가 신앙과 율법,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고투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했고, 분노했고, 용서했고, 실패했고, 외면당했고, 또다시 사랑했다. 그런 투쟁의 시간을 통해 그는 신에 대한 이해에 도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해가 신뢰로 이어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도, 그는 그 관계를 끝내 부정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신론과 무신론이 대립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와 예수 사이에서는 그렇다. 그건 믿음과 불신의 싸움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어떻게 향할 것인가에 대한 다른 방향으로부터의 접근일 뿐이다. 그리고 그 다름은 오히려 우리를 연결해 준다. 예수는 자신을 끝까지 신에게 밀어붙였다, 결국 그는 침묵하는 신에게 자신을 맡겼고, 그 과정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예수는 자신의 마지막 문장을 ‘위탁’으로 남겼고, 나는 아직 그 문장을 쓰지 못한 채 살아간다. 나는 아직 신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직 내 문제도, 내 과제도 해석되지 않았다. ‘부탁합니다’는 아직 내 문장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나를 위탁할 수 없다. 아직 살아야 할 날이 많고, 알아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공부하는 중이다. 언젠가는 나도 예수처럼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를 이해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내가 예수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신을 향한 길을 제시한 사람이 아니라, 자유의 길을 찾아 헤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죄가 아니다. 예수는 무신을 정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무신 또한 예수의 신을 모욕할 의사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서로의 방식으로 자기의 마지막 문장을 찾아갈 뿐이다. 나에게 “부탁합니다”라는 말은 아직 어색하다. 나는 그 문장보다 한참 뒤에 서 있다. 그러나 그 거리감이 때로는 가장 정직한 연결이 되기도 한다.
이 연재를 처음 접하는 분들은 '서문'을 읽어 주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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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가 사랑한 예수>는 Medium에서 영어로도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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