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텃밭 농장 주인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공지사항. 휴지나 쓰레기를 쓰레기봉투에 넣어 달라는 말과 함께 공지사항의 본론 같은 부탁이 이어졌다.
'힘들게 땀흘려 농사지은 농작물들이 소실되거나 밭을 밟고 망치는 경우가 있다고 하시니…… 참 마음이 안 좋습니다. 일일이 cctv 돌려보다 공문 올립니다…….'
헉. 순간 이틀 전에 내가 밭에서 한 일이 떠올랐다. 딴 생각을 하며 물탱크에 물 조리를 갖다 놓고 오다가 옆집 텃밭을 내 밭으로 착각하고 고추를 땄던 것이다. ‘아까 땄는데 큰 게 더 있었네?’ 생각하면서. 바로 남의 밭이라는 걸 알아챘지만 내 손엔 이미 고추 다섯 개가 쥐어져 있었다. 저녁 시간의 농장엔 오직 나뿐이라 내 실수에 대해 호들갑을 떨거나 고백할 상대가 없었고, 의도치 않게 절도한 고추를 집에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농장 주인의 문자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저 그제 옆집 밭을 제 밭으로 착각하고 고추 다섯 개를 땄습니다. 후에 배상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ㅋㅋㅋ 그건 모르는 일이고요ㅋ 수박밭 얘기하는 거예요.
어제 누가 수박밭을 다 망가뜨렸대요.
귀여우셔욥.^^'
아니, 그렇게 귀하게 키운 수박을? 삼발이 지지대 위의 파란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놓여 있던 수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농장에서 수박을 키우는 사람은 나뿐인 줄 알았다가 한 집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얼마 전이었다. 콩알만 한 수박이 열리자마자 몇 번째 가지인지 따지지 않고 감지덕지 키웠던 나와 달리, 그 집은 일찌감치 나온 수박들을 잘라내다가 열다섯 번째 가지 이후에 나온 수박을 키우기 시작했고(수박이 매달린 위치로 추정) 그 수박은 하루가 다르게 둥글둥글 커지고 있었다. 열다섯 번째 가지 이후의 수박이어야 큼직한 우량 수박으로 자란다는 것은 유튜브에서 보아 알고 있었지만, 나는 팔 게 아니라 가족끼리 먹을 거라면 일찍 나온 아이라도 적당히 키워 먹는 게 좋다는 어느 유튜버의 조언을 따랐다. 그 결과 처음 얼마간은 쑥쑥 자라던 수박이 청소년기도 맞이하기 전에 성장이 더디게 되었고…….
뒤늦게 열린 이웃 텃밭 수박은 금세 내 텃밭의 수박만 하게 자랐고, 주인은 덩굴 식물용 삼발이 지지대를 세우고 그 크기에 맞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올린 다음 그 안에 수박을 곱게 올려놓았던 것이다. 수박 밑에 지푸라기 같은 걸 받쳐주면 좋다는데 도시에서 지푸라기를 구하긴 어려워 생각해낸 아이디어 같았다. 밭에 오는 시간이 달라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정석으로 정성을 다해 작물을 키우는 농부인 것 같았다.
며칠 후 텃밭에 가보니, 공들여 키우던 이웃의 수박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농장 주인의 말로는 누군가 그 수박을 발로 짓밟아놓았다고 했는데, 그 정도면 텃밭에서는 만행이라 할 만했다. 애지중지 최선을 다해 수박을 키웠던 주인이 얼마나 분통 터졌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수려한 북한산 밑 농장에 3.3평의 땅을 분양받았을 때, 텃밭을 어지럽힐 무법자가 나타나리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열무 씨를 뿌린 내 밭에서 커다란 발자국을 발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텃밭들도 넓지 않고 고랑이 잘 만들어져 있는데 뭐가 급해서 남의 텃밭을 밟고 다니는지, 그 무례한 발자국은 이후에 비슷한 위치에서 또 한 번 보아야 했다. 바쁜 일상에 시간을 내어 손수 채소를 길러 먹는 사람이라면 기본 예의와 상식 정도 당연히 장착하고 있을 것이라는 건 순진한 생각이었나?
가끔 나에게 농사 코치를 하곤 하던 남자가 도를 넘은 친절을 베풀어 기겁을 했던 적도 있다. 주민센터에서 무료 제공하는 미생물 효소를 분무기에 담아 고추나무에 칙칙 뿌리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가 “그거 가지곤 안 돼요” 하더니, 어디서 농약 분무기를 가져와 내 고추나무에 거침없이 뿌려댔다. “됐어요, 됐어요” 두 손을 정신없이 내저으니 그제야 멈추었다. “다들 그렇게 해요”라는 거짓말을(난 농약 뿌린 텃밭을 두세 집밖에 못 보았는걸?)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물을 받아다 흰 액체가 씻겨 내려가도록 했다. 물어보지도 않고 남의 밭에 농약을 뿌리는 당당함이 놀라울 뿐이었다. 농약을 칠 거라면 차라리 마트에서 사다 먹지 텃밭 농사는 왜 짓는지 알 수 없었다.
심각한 문제는 아니나 그 밖에 텃밭에서의 비상식은 심심치 않게 보았다. 잡초를 모아 말리는 곳이 따로 있는데 고랑에 쌓아놓는다거나, 텃밭의 입구 역할을 하는 곳에 승용차를 주차해 막아놓는다거나, 텃밭 가장자리에 사용 금지된 판자를 둘러친다거나……. 텃밭에 가졌던 환상은 그만큼씩 줄어들었다. 이웃의 수박이 짓밟힌 건 확실하게 환상을 깨는 ‘대박’ 사건이었다.
그런데, 내 텃밭의 수박은 어떻게 되었냐고? 어느 날 뿌리에서 가까운 가지들이 말라죽은 걸 발견하곤 어쩔 수 없이 수박을 딸 수밖에 없었다. 수박의 성장 속도가 현저히 더뎌졌다는 느낌이 들 즈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초보의 수박 농사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하니 애플수박 크기의 수박 두 개를 얻은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속이 아직 덜 익은 귀한 수박을 맛보는 행운은 엄마와 오빠에게 돌아갔다.
꿈꾸는 텃밭에서 농사가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는 않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