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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o Nov 04. 2020

여행은 언제나 옳다

여행이란 참 신기한 일     


첫 번째 방콕 한 달 살기는 희망이었다. 그렇게 머물렀던 방콕에서의 한 달은 내 인생 베스트컷이라고 해도 될 만큼 찬란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나는 다시 방콕으로 떠났다. 두 번째 방콕 한 달 살기는 절망이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창업에 실패했다. 우리는 마지막 프로젝트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 일로 동료들과 심각하게 싸웠다. 사실은 1년 동안 묵은 감정이 그 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나는 무작정 방콕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두고 방콕으로 도망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떠날 날만 기다리는 그 2주의 시간은 칠흑처럼 어두운 날들로 내 기억에 남았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가슴이 턱 막혔다. 내 인생은 이렇게 망한 것으로 끝나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당장 내일은, 다음 달은, 통장 잔고가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엄습했다. 도저히 진정이 안 될 때면 무작정 밖을 나가 걸었다. 다행인 건 한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걸으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살이니, 죽음이니, 이런 무서운 단어까지는 아니다. 그냥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이 세상이 아니라거나,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한다거나, 갑자기 차에 치인다거나 하기를 바랐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한국이 아닌 외국이어야 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내 비참한 마지막을 보여주는 건 죽는 것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방콕으로 도망치면서, 그 방콕에서 삶이 끝나기를 바랐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당시 나는 불안 증세가 꽤 높았고, 약간의 우울증도 있었다.      


자살 시도 경험자들에 따르면, 자살을 시도하는 그 순간 곧바로 후회한다고 한다. 살겠다는 의지가 본능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여행은 참 신기한 게, 외국 땅을 밟는 순간 거짓말처럼 생의 의지가 샘솟는다. 시작은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다. 비행기에서 빨리 내려, 빨리 입국 수속을 마치고, 빨리 짐을 찾아 공항을 빠져나가야 한다. 나는 재빨리 사람들을 제치고 더 짧은 줄에 섰다. 내 아까운 시간을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다. 심지어 짐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서 그 틈에 당장 쓸 현금을 환전하고, 그 돈으로 유심을 산다.  

   


유심을 살 때도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절실함이 작동한다. 보통 태국 현지인들은 편의점에서 유심을 구입해 데이터를 충전해서 쓴다. 이 충전을 탑업(Top-up)이라 한다. 편의점 직원에게 탑업 해달라고 할 수도 있고, 혹은 편의점이나 지하철에 있는 탑업 기계를 이용해도 된다. 외국인도 똑같은 방식으로 유심을 사고 충전할 수 있는데, 문제는 공항에서 이 유심을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항에서 파는 유심은 이것과 종류가 다른 관광객 전용이라고 볼 수 있는데, 5일, 일주일, 한 달 등의 이용 기간에 데이터 사용량도 각각 다르다. 당장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으면 택시도 제대로 잡을 수 없을 테니 일단 공항에서 유심을 사야만 한다. 하지만 3일이나 5일짜리는 가성비가 좋지 않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일주일에 데이터 무제한이 가장 가성비가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주일 뒤에는 시내 편의점 유심을 탑업해서 쓰면 매우 저렴하다.    

  


여행이 언제나 옳은 건 억지로라도 변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우울함과 반복되는 일상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다. 우울하기 때문에 매일 같은 패턴으로 시간을 보내는 건지, 똑같은 일상을 살다 보니 우울해지는 건지 알 수 없다. 이 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영원히 반복되는 관계일 것이다. 내가 방콕에 가기 전 집에서 누워만 있던 게 딱 그런 시간의 연속이다. 이 우울함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환경 변화가 필요하다. 이주를 제외한다면, 여행은 우리 삶에서 가장 큰 환경 변화가 분명하다. 과거 여행은 상인이나 원정 가는 군인들이 목숨을 걸고 떠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여행은 너무나도 안전하지만, 그래도 말도 통하지 않는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큰 일이다. 류시화 시인은 가난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하며, 절실함을 강조했다. 사람이 절실하면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내는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나는 누구든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면 그 어떤 절실함이 생길 것이고, 그게 살고자 하는 의지로 변하리라 확신한다.          

  



'방콕에서 잠시 멈춤'을 출간했습니다. 

더 생생하고 재미있는 방콕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49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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