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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브 Mar 08. 2024

프랑스에서 400일 - 8)프랑스인들




릴 Lille 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기숙사 아래층에 사는 터키인 볼칸과 함께 프랑스 프로축구 리그 릴과 보르도의 경기를 보러 축구경기장에 간 적이 있었다.


전반이 끝나고 선약을 깜박했다는 볼칸을 경기장밖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직원들이 들어갈 수 없다 막아섰다. 표를 보여줬지만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갈 수 없다며 단호한 표정로 말했다.


나는 몰랐다고 친구가 출구를 못 찾아서 려다 준거라고 설명했지만 규정이 생각보다 엄격하게 지켜지는 듯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직원이 주머니에서 두 번 접혀있던 표를 꺼내서 건네주며 이걸 가지고 들어가라고 했다. 규정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직원은 아 왜 또 그러냐는 식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조용히 하라는 눈빛으로 응수했다.


표를 받아 들고 들어갔는데 굉장히 비싼 자리였다. 항상 저렴한 구석 자리에서 보다가 좋은 자리에 앉아보니 축구 볼 맛이  났다. 프랑스인들 중에도 괜찮은 사람도 있다는 걸 처음 느낀 날이었다.





프랑스의 전쟁영웅 샤를 드골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조국 프랑스를 사랑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싫어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느낄 수 있을 때가 종종 있긴 했다.


프랑스인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일지 되짚어보니 아마도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할 때였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입국심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첫 번째 여권에 프랑스 입국 도장이 없었다.


그때 아마도 공항에 입국하는 사람이 진짜 너무 많아서 그랬던 것 같은데 이것이 내가 중에서야 알게 된 일반적인 프랑스인의 업무방식이긴 하다.


쉽게 말하면 담당자가 그냥 알아서 한다는 것인데 사기업에선 그렇다 쳐도 관공서에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 한국인 입장에서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프랑스인끼리도 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프랑스적인 것들이 싫어서 한국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을 몇 명 알고 있다.


다시 하던 얘기로 되돌아오자면 첫 번째로 마주친 프랑스인은 기숙사의 사무직원 아주머니였다. 영어를 못하는 분이셨다. 프랑스어로 열심히 설명해 주셔서 가지고 있던 불영사전을 건네 드렸더니 단어 하나를 가리키며 몽디 몽디 라고 하셨다.


그 단어는 먼데이 monday 였고 프랑스어식으로 발음하면 몽디가 될듯하다. 너무 기초적인 영어단어의 발음을 모른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이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그날이 토요일이라 월요일에 다시 오라는 뜻을 알아들은 뒤였다. 한국에서부터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방금 프랑스에 도착했는데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요 아주머니.


이런 위기 때마다 나를 도와준 것은 중국인들이었다. 지금에야 케이팝 때문에 한국을 다들 좋아하지만 오래전부터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내가 한국인인 줄 알고 한국어로 말을 걸었더니 자기가 한국인으로 보이냐며 뛸 듯이 기뻐했기 때문이다.


암튼 그 중국인 여학생이 어딘가 다른 사무실에 같이 가서 말해준 덕분에 나는 무사히 기숙사방에 짐을 풀 수 있었다.

프랑스인이 안된다고 할 경우에 다른 프랑스인을 찾아가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중국인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명 더 얘기하자면 기숙사 옆방기계박사과정 중이던 중국친구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식용유를 때려 넣은 중국식 국수요리를 해주는 것을 좋아했 박사과정을 빨리 끝내고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탁구를 귀신같이 잘 치던 녀석이었다.


탁구를 좀 치던 나는 숙적 일본 교환학생 히데오를 포함 북미, 남미, 유럽, 아프리카등 전 세계에서 모인 유학들을 아주 쉽게 작살냈지만 옆방의 그 xx한테는 거의 눈감고 (실제로 감고 쳤다) 아무튼 유린당했다. 지금도 살짝 분하다.





네덜란드반 프랑스반의 토마스는 기숙사방벽에 거대한 네덜란드 국기를 붙여놓고 살다.

처음 녀석의 기숙사방에 갔을 때 일반적으로 프랑스인들이 먹는 음식을 주겠다고 하면서 냉동피자를 뎁혀준 녀석이다.


전형적인 사회주의자로 그 녀석을 따라서 당시 사회당 총수였던 세골렌 루와얄 Segolene Royal 의 정치집회에도 가보긴 했다. 면을 파스타처럼 포크로 둘둘 감아 먹길래 제대로 먹는 법을 가르쳐줬더니 굉장히 기뻐했다.


유명정치대학을 다니 항상 웃는 얼굴의 친절한 범생이었지만 여자이야기를 할 때는 천하의 난봉꾼으로 변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도 가끔 연락했었는데 유럽연합 사무국의 꽤 높은 자리에 가고부터는 연락하기가 부담스러워져 버렸다.


스트라스부르에 살던 빡빡머리 그렉은 어릴 때부터 호텔 리셉션에서 일했다고 한다. 일하지 않을 때는 거의 집에서 플스만 했는데 프랑스어를 한다는 것 빼고는 한국인과 다른 점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국에도 놀러 와서 우리 집에 초대해서 부모님까지 만나보고 했는데 역시 결혼 후 연락이 끊기게 되는 것까지 한국인과 완전히 같았다.


피아니스트 제시는 아는 후배의 남자친구였는데 어떤 와인을 먹어야 하는지 심도 있게 알려주었다. 물론 대부분 10유로 이하의 저렴한 와인이었다.


사온 와인을 따서 바로 마시려 하자 급하게 제지하며 와인은 따놓고 최소 한 시간 후에 마셔야 한다고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비교하자면 외국인 친구가 냉장이 안된 소주를 사 와서 미지근한 채로 바로 마시려고 하면 목을 졸라서라도 못 먹게 할 듯한 느낌과 비슷할 것 같다.


제시와 함께 전철을 타러 가면 묘기를 볼 수 있었다. 녀석은 항상 프랑스인의 권리라며 전철표를 사지 않고 매표 기계를 뛰어넘어 다녔는데 그 이유에 관해서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느 날엔가 파리에서 방을 구할 때 만나게 된 부동산 사장님 무슈 스테판과 소르본대학 근처의 팡테옹 앞을 걷고 있었다.


지저분한 도로를 건너다가 길에 떨어진 무언가를 유심히 보길래 무언가 봤더니 볼펜이었다. 흙탕물에 범벅된 그 볼펜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더니 사정없이 팔뚝에 그어서 아직 잉크가 남아있는지 확인했다. 잉크가 선명하게 나오자 주머니에 넣었다가 사무실에 도착해 볼펜꼿이에 시크하게 집에 넣었다.


내가 봤던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굉장히 검소했고 명품은커녕 값비싼 물건을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는 Zara 에서도 세일기간을 기다렸다가 샀다. 그것도 50퍼센트 할인할 때 봐뒀다가 70퍼센트까지 할인하면 그때 가서 샀다. 그러고 나서 전쟁에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한번 사면 문제가 생길 때까지 썼다. 문제가 생겨도 그냥 쓰기도 했다.


프랑스인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데 자본주의사상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문제는 돈을 들이부어서 해결하려는 미국스러운 사고방식을 혐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맥도널드 국가별 매출 순위에서 부동의 1위는 바로 프랑스였다. 게 줄여서 맥도 McDo 라고 불렀는데 진짜 무지하게들 먹었다. 그리고 맥도를 포함해 대부분의 음식점이나 카페에서는 샹송이 아닌 팝송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뉴욕 맨해튼의 거리를 걷다 보면 사방에서 프랑스어가 들려온다. 뉴욕 어딜 가든 왠 프랑스인이 이렇게 많은지 계속해서 놀랬던 기억이 난다. 미국은 싫어해도 그렇게들 뉴욕여행을 좋아한다고 한다.

프랑스인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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