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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브 Sep 15. 2024

나의 고전문학 입문기



나에게 종교를 묻는다면 무교라 답하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고전 문학이라고  수 있을 것 같다. 종교와 비교할 만큼의 무조건적인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으며 쓰는 글 속에서나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도 무심결에 포교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부분의 고전을 읽었다거나 항상 책을 읽고 있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수십 권의 고전을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로 보인다.


나에게 맞는 대여섯 권의 고전을 골라 평생에 걸쳐 가끔씩 다시 읽고 생각해 보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전의 독서방법이다. 


그냥 한번 읽고 나 그거 읽었어 이런 내용이야 라고 하려면 고전보다는 <사피엔스><총 균 쇠> 같은 책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책들도 한 번보다는 두세 번은 읽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긴 한다.







어릴 적에는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설록홈즈 전집><삼국지> 정도가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만화책은 많이 읽긴 했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아마도 교양수업 중의 철학수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어오는 것이 과제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책을 읽었는데 굉장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화책을 읽다가 맘에 들면 작가의 모든 작품을 싹 다 찾아 읽었던 나는 까뮈의 <페스트><전락> 그리고 <시지프의 신화> 등 많은 책들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방인은 고전입문에 아주 좋은 책인 것 같다.


까뮈가 슬슬 지겨워지자 까뮈의 책들이 있던 유럽권 소설 섹션에 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읽게 되었다. 나중에 영화로도 나와서 반가웠는데 쥐스킨트의 작품은 물론 고전은 아니었지만 독서라는 것에 내가 흥미를 가지게 해 준 것 같다.


향수에 이어서 읽은 <비둘기><콘트라베이스>는 독서의 타오르는 불씨에 기름을 끼 얻었고 <좀머씨 이야기>에서 제발 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시오! 한마디에 나는 전히 빠져들게 되었다.


쥐스킨트 다음에 읽을 책을 찾다가 나는 드디어 무라까미 하루끼의 <노르웨이의 숲>을 만나게 된다. 아시아권 소설섹션에 갔었는데 집어든 책마다 노르웨이의 숲의 작가가 쓴 책이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공강시간에 학회실에 잠깐 앉아서 읽다가 수업 갔다 와서 몇 시간에 걸쳐 마저 다 읽어버렸는데 다 읽자마자 바로 다시 첫 장으로 가서 한번 더 읽기 시작하게 되었다. 덕분에 책 읽는 오빠타이틀을 얻기도 했는데 이후로 나의 손에는 거의 항상 책이 들려 있었던 것 같다.


이전 글에도 쓴 내용이지만 무라까미 하루끼의 특징은 자꾸 다른 책 특히 주로 고전을 홍보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토마스 만의 <마의산>을 읽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 너무 어려워서 짝 어지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대한 게츠비>가 압권이었다 읽고 나 뭘 읽은 건가 싶었다. 어려운 책들을 읽다가 만난 헤르만 헤세는 친절했다.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는 재미있을 정도였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한번 읽어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읽을 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이런 고전들을 읽다가 하루끼의 책을 읽으면 만화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잘 읽히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그의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작품 속에서 계속 고전을 읽고 고전에 대해 얘기하길 원했다. 뭔 얘긴지 알고 싶으면 나도 <안나 까레니나>를 읽어야 했다.


톨스토이는 그나마 나았다. 이름도 어려운 도스토예프스키는 번역서인데 러시아어로 보였다. 그래도 <죄와 벌>을 간신히 읽긴 했는데 아마도 릴의 기숙사에서 읽었을 것이다. 랑스어 원서를 보다가 영어만 봐도 그렇게 쉬워 보였는데 한국어로 된 책을 읽으니 그나마 읽을 만했던 거 같다.


파리에서 카프카의 <>을 읽었는데 두 번 읽을 자신은 없었다. 이때쯤에 마의산을 서너 번쯤 읽은 것 같은데 이제 좀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가 시작했던 것 같다. 아마도 열 번 정도 읽었을 때 전체내용이 머리에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의산이 죄와벌이나 성보다 좋은 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살아온 나의 무엇과 잘맞는 책이 각자에게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와서 니체의 <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게 되었는데 이제 조금 고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느꼈다. 아마 이때쯤부터 고전에 대한 확신이 들고 신앙심이 싹튼 것으로 기억한다. 주변에도 권유하기 시작했고 단테의 <신곡> 읽어보기 시작했다.


마의산의 주인공 한스는 시간이란 개념에 대해 고민하곤 하는데 책을 읽으면 토마스만과 나까지 셋이 함께 시간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고전이라는 것이 왜 수백 년간 사라지지 않고 전해 내려왔는지 이유를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아마도 이때쯤부터 친해진 후배나 맘에 드는 회사 동료에게 데미안 같은 책을 사서 선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 읽지 못하거나 읽어도 더 이상 다른 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아마 이방인을 읽기 전의 나에게 누가 책을 선물했더라면 나도 어딘가 처박아두고 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맥락 없는 일방적인 포교활동은 그만두기로 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전략적으로 접근해보려 했다.


하지만 기회가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고 간혹 책을 읽으려는 자들도 책을 읽고 돈을 벌 수 있기를 바랐다.


돈 벌게 해 준다는 책을 읽는다고 돈을 벌 수 있게 되진 않는다. 오히려 <전쟁과 평화>를 읽는 편이 장기적으로는 돈을 벌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을 텐데 렇게 말하면 무도 믿지 않았다.


그제서야 왜 무라까미 하루끼가 책 속에서 계속 구체적인 고전의 책 제목까지 거론했는지 알게 되었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레벨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것 같고 나정도는 그저 이렇게 일기같은 글이라도 써보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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