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사랑할 북스테이
동네책방, 이색책방을 탐방한 책들, 기사들이 눈에 많이 띈다. 코로나 시기, 독립서점뿐 아니라 온라인 대형 서점도 문을 닫고 있는 가운데에도 책방 창업에 대한 책들이 꾸준히 나온다.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솔직히 정말 책이 팔릴 거라 생각했나?』,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책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등의 책은 제목부터 섬찟하다. 직관적이고 실용적인 제목일수록 현실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수익 모델을 위해 음료와 굿즈를 팔며 카페에 책방이 먹히는 경험, 인플루언서의 홍보를 기대하고 싶으나 구매 대신 사진만 찍는 방문객들, 근근이 ‘살아갈’ 수는 있지만 ‘잘 벌’ 수는 없는 현실까지, 적자를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가 책방 오픈의 가장 큰 관건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먹고 살 수 있는 생업이 아닌 힘겨운 취미 생활, 꿈이 아닌 이미지 소비를 각오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
내가 사는 도시, 북한산, 청계산 인근부터, 세검정, 한양도성 성곽길, 남산 둘레길, 올림픽공원, 서울숲에 이르기까지, 자연경관과 문화유적이 멋진 지역을 바라보던 시선이, 치악산 자락, 소양댐 인근으로 넓혀지고, 통 건물이라든가 버젓한 상가 임대 같은 허황된 꿈에서 중고 컨테이너 매수를 찾아보게 된다. 괴산에 방문했을 때 백창화 작가님은 차분하게 단호하게, “서울에 할 것은 아니죠? 요기서 내려가면 문경이 있어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라 조언하셨다. 올라오는 길에 문경새재를 들르니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선비들의 평생 독서 기운을 받는 듯했다. 생각할수록 위치는 서울에서 멀어지고, 부지는 좁아지고, 공간은 소박해진다.
25년을 여행업에 종사해온 터라 책방으로 여행 오는 독자를 맞고 싶다. 수익 모델로 생각하는 스테이를 통해 읽는 행위뿐 아니라 머묾의 공간을 함께 꾸리고 싶다. 독립출판물, 특정 분야의 서적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더라도, 보편적인 책들을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도록 작은 공간 안에 갖추려면, 눈과 귀를 열고 몸을 움직여 부지런히 큐레이션해야 할 것이다. 파이어족이 되기엔 이미 너무 오래 회사원이었고, 연금생활자가 되기엔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다. ‘잘 벌’ 수 없어도 ‘살며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체념과 순응이라기보다 도전과 꿈이다. 장전과 조준이 필요하지만 발사도 이루어야 삶이다.
강릉에서 해돋이를 보고 언덕길을 내려오다, 노란 간판이 선명한 작은 가게 앞을 지나쳤다. 느낌이 책방이다. 차를 돌려 편의점 앞에 세우고 보니, 영화관인지, 상가주택인지 모를 이층 건물이 색다르다. ‘라라랜드’와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의 포스터가 외벽에 걸렸다. 간판을 자세히 보니 “No one belongs here more than you”라고 적혔는데, 언뜻 봐도 고정이 아니고 늘 바뀌는 분위기다. 가게 밖에 얌전히 놓인 두 자리의 관객석을 지나 육중한 검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둑하고 아늑한 공간이 펼쳐진다. ‘영화로운 스테이’ 정동진 이스트 씨네였다. 안쪽에는 중형 스크린과 열 석 남짓의 작은 극장이 있고, 작으면서도 여유로운, 신기한 서가에는 영화 관련 책들이 꽂혀 있다. 책방지기가 거주하는 2층 살림집에 방 하나를 내어주고 거실과 주방을 쉐어하며, 원할 경우 비건식의 저녁식사도 함께 하는 곳이라 했다. 해가 뜨는 시각에 문을 여는 만큼, 오수라도 즐길 만한 대낮의 브레이크 타임을 갖고 저녁에도 해가 질 무렵 문을 닫는다. 1,2층을 오르내리며 책을 읽을 수 있고 문을 닫은 후에는 영화를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는 것. 영화로운 아침, 영화로운 스테이, 영화로운 책방이라는 이름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곳에서는 『포레스트 검프』와 『와인이 있는 100가지 장면』을 샀다. 책방지기님이 쥐어 주신 작은 팝콘 봉지와 명대사 책갈피도 역시 영화로웠다.
수지타산을 고려한 촘촘한 기획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현실이 아닌 영화 같은 공간에서 현실을 극복할 것만 같은 힘을 얻는다. 내가 사랑할 북스테이는 까칠하고 건조하게 계산기를 두드릴 곳이 아니라, 책이 가득한 우리 집 문을 개방하고 나누는 공동체 공간으로 구체화된다. 전통적이면서도 글로벌한 이름의 ‘수북강녕(壽book康寧)’답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