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강의가 끝날 무렵 과제가 떨어졌다. 각자 쓰려는 책 주제, 프롤로그 글도 미리 써오면 더 좋다고 덧붙였다. 책의 주제를 고민했다.
“작가님, 주제랑 글쓰기 방향을 이렇게 써봤어요. 요즘 내향인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다뤄지고 있고, 제목에 ‘달리기’라는 단어가 있어야 정체성이 있을 것 같아서요. 냉철한 검토 부탁드립니다."
제목은 '내향인의 달리기', 부제는 '겁 많은 I인 내향인이 세상과 함께 달리는 법'이라고 적었다. 작가님은 제목이 너무 좋다며 연달아 감탄을 보냈다. “딱 와닿아요. 진짜 좋아요. 부제도 너무 좋아요. 일단 그 주제로 가보죠. 승우님은 프롤로그 내용에 ‘4년간 달리며 배운 것들’을 포괄적으로 정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출근길 버스 안에서도, 퇴근 후 도서관에서도 틈만 나면 메모장을 열었다. 며칠 동안 정리하고 고치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프롤로그 초안을 작가님께 개인톡으로 보냈다.
"나는 4년의 달리기 실험을 통해 잘 달리는 법이 아닌 내향인이 세상과 눈 맞추는 법을 배웠다. 시선을 피하며 살아왔던 소심한 I가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용기와 당당히 세상과 시선을 맞추는 법.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지독한 내향성조차 단점이 아닌 각자의 위대함이 된다는 것.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여전히 최고라고 믿는 세상에서, 빠른 달리기가 아닌 ‘바른’ 달리기가 앞으로 내가 추구할 방향임을 배웠다.
혼자 달리고 싶을 때 혼자 달릴 수 있는 용기,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힘,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달리는 법,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신감을 배웠다. 새벽잠이 많아도 고통의 무게가 더 크다면 이불을 박차고 눈물 흘리며 달릴 수 있음을, 일그러진 얼굴로 한계에 도전하는 러너들의 표정에서 고통과 사랑이 결국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스스로가 고통을 피해 도망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고통과 마주 보고 달려가는 용기 있는 사람임을 배웠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세상에 드러낼 때, 삶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고 더 나은 사람들과 함께 달릴 수 있다는 것, 아무리 빨리 달리더라도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성취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긴장된 마음으로 답을 기다렸다. 잠시 뒤 작가님이 이렇게 말했다. “와, 승우님 글솜씨 보통이 아니시군요. 진심으로요.” 화면에 뜬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리딩 작가님께 받은 첫 번째 칭찬... 내친김에 목차도 미리 써보기로 했다. 고민하며 끄적이다가 목차 초안을 작가님께 보냈다.
"<제목 : 내향인의 달리기 (부제 : 겁 많은 I가 세상과 함께 달리는 법)>
<프롤로그 : 3년의 달리기 실험을 통해 배운 것>
<Part I. 저는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두려움 하나 : 몸
두려움 둘 : 관계
두려움 셋 : 외로움
두려움 넷 : 남자다움
두려움 다섯 : 수치스러움
<Part II. 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달리기 하나. 새벽에 달리는 울보 러너
달리기 둘. 달리다가 죽어도 좋을 만큼
달리기 셋. 누군가와 함께 달린다는 것
달리기 넷. 풀코스를 넘어 100km 울트라 마라톤
달리기 다섯. 빠른 러너가 아닌 바른 러너
달리기 여섯. 일상을 대회처럼, 삶을 달리기처럼
<Part III. 이제 나는 겁내지 않습니다>
용기 하나 : 몸 드러내기
용기 둘 : 얼굴 드러내기
용기 셋 : 마음 드러내기
용기 넷 : 수치심 드러내기
용기 다섯 : 꿈 드러내기
용기 여섯 : 세상과 눈 맞추기 "
작가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승우님 목차 정리하시느라 너무 고생하셨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 넣으실지 궁금하네요. 다만 파트 1의 경우 비중을 너무 많이 두고 '두려움'에 대해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파트 1 전체가 다양한 두려움에 관한 것인데 이것을 겹치지 않게 채워나가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 보여요. 독자입장에서 큰 챕터 하나에 내내 두려움에 대해서만 언급하면 조금 갑갑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먼저 목차에 대한 강의를 듣고 다시 고민해 보셔도 좋겠어요."
두 번째 강의가 시작됐다. 줌 화면 너머로 작가님이 첫마디를 꺼냈다.
“책을 쓰는 건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그 집의 설계도, 즉 목차를 짜는 법을 알려드릴게요.”
강의는 단계별로 진행됐다. 먼저 글감을 전부 쏟아내라고 했다. 경험, 사건, 깨달음, 노하우를 한꺼번에 적어놓고 비슷한 것끼리 묶어 꼭지에 넣고, 한 권은 보통 프롤로그, 본문 5~6장, 에필로그 구조로 가며 전체 꼭지는 40개 안팎이 적당하다고 했다.
작가님은 각 장의 역할도 짚어주셨다. 1장은 독자를 초대하는 장, 내가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밝히는 곳. 2장은 독자가 왜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지 설득하는 장. 3~5장은 본론으로 경험과 사례, 방법과 전환점을 담는 장. 마지막 장은 정리와 실천으로 마무리하는 장이라고 했다.
“제목의 톤도 통일해야 합니다. 문장형이면 끝까지 문장형으로, 시간 순서면 끝까지 시간 순서대로, 키워드형이면 끝까지 키워드형으로. 흐름이 뒤섞이면 독자가 금세 지칩니다.”
버리기 아까운 글감에 대한 팁도 덧붙였다. 본문에 넣기 애매한 내용은 Q&A나 팁 코너에 묶어서 책의 밀도를 높이고, 본문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목차 제목을 독자가 궁금해할 질문형으로 바꿔보라고 했다. “달릴 때 통증은 참아야 할까?” 같은 제목으로 바꾸면 각 꼭지에 무슨 내용을 넣어야 할지가 선명해진다고 했다.
두 시간 가까운 강의가 끝날 무렵, 과제가 주어졌다. 목차 1차 안을 40 꼭지 내외로 만들고, 제목을 질문형으로 바꿔보고, 중복된 목차를 수정하고, 팁과 Q&A를 배치하고, 제목 톤을 통일해 오는 것이었다. 문장 다듬기는 나중 일이고, 지금은 구조를 세우는 게 우선이었다.
왠지 내가 썼던 목차 초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 라틴어 수업의 목차를 따다 써볼까? 이렇게 고쳐 써보았다.
"<내향인의 달리기 (겁 많은 I가 세상과 함께 달리는 법)>
<프롤로그>
<목차>
1. 내 안의 빛나는 그림자
2. 첫 달리기는 아팠습니다.
3. 달리기라는 은밀한 취미.
4. 우리는 성적이 아닌 성장을 위해 달린다.
5. 달리기의 단점과 장점.
6. 우리 각자를 위한 '써브 쓰리'.
7. 나는 글 쓰는 러너입니다.
8. 내게 닥치는 일은 모두가 나를 위한 일입니다.
9. 만일 달리지 않았다면.
10. 러너는 숫자로 삶을 기억한다.
11. 모든 동물은 달린 후에 행복하다.
12. 당신이 잘 달렸다면 참 다행입니다.
13. 오늘은 나와, 내일은 너와.
14. 달리다 지금 죽어도 좋아.
15. 나는 바른 러너가 되기로 했습니다.
16. 달리는 사람의 놀이.
17. 아픈 만큼 배운다.
18. 나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
19. 달리는 사람입니까?
20. 마라토너의 표정
21. 한계를 넘어서
22. 달려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23, 이 또한 지나가리라.
24. 달리는 당신은 아름답다.
<에필로그>"
흐뭇한 마음으로 다시 작가님께 보냈다. 조심스럽게 작가님이 이렇게 말했다.
"승우님 적어주신 꼭지들이 되게 매끄러운 느낌이에요. 이미 완성된 느낌의 문장들? 제 피드백을 보시면 좀 더 목차구조를 파악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차. 이건 내 것이 아니구나. 매끄럽기만 할 뿐. 다른 책의 목차를 따오는 건 나와 맞지 않았다. 다시 출발선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직 예열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달리듯 써 내려가야 할 시간은 이제부터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작가님의 피드백 파일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