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딸과 달리기 나무
밤 10시, 피곤해서 일찍 침대에 누웠다. 누군가 문을 빼꼼 열고 쳐다본다. 중3 둘째 딸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 피곤해?"
"조금? 눈이 아파서 좀 일찍 누웠어."
"나 지금 뛰러 갈 건데... 혹시 같이 안 갈래?"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같이 가자. 지금 옷 갈아입고 나갈게."
딸아이가 씩 웃더니 방문을 닫는다. '이게 꿈일까?'
어느 겨울 찾아온 딸들과의 동반주.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건지, 아니면 천방지축 달리고 달리는 아빠의 모습에 감화가 된 건지 모르지만 그렇게 달리기가 아이들과 나를 이어주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달리던 꿈같던 셋의 동반주는 개학과 동시에 끝났지만 진한 추억으로 남았다.
두 딸과 항상 바라던 어깨동무 뒷모습 사진도 찍었다. 책 속 '사춘기 딸과 달리기 나무'에도 그날 이야기를 남겼다. 오디오북이 나온 뒤 그 에피소드만 떼어서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아빠의 선물이야. 오디오북 중 너희 에피소드. 잘 간직해"
꿈결 같던 그해 겨울이 지나고 같이 달릴 기회는 없었다. 아이들은 다시 달리기와 먼 일상으로 돌아갔고, 나는 달리고 책을 쓰느라 각자의 자리에서 바빴다. 대학생이 된 첫째는 캠퍼스 라이프로 둘째는 학원과 친구들로 각자 분주했다. 이제는 같이 달릴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아이가 안 뛰다가 오랜만에 뛰면 힘들까 봐 걱정되어 물었다.
"괜찮아? 안 힘드니?"
"괜찮아. 요즘 가끔씩 혼자 나가서 뛰어. 요즘 학교에서도 달리는 친구들이 많아져서 다시 뛰고 있어."
"그랬구나. 아빤 아예 몰랐어. 가끔 너 러닝화가 나와있어서 그냥 걸을 때 신고 있나? 생각했었어. 대단하다. 뛰고 있었구나."
"아빠랑 예전에 런데이 친구 맺었잖아. 예전 기록 보고 있는데 아빤 넘사벽이더라. 칼로리나 마일리지, 속도도. 어떻게 그렇게 잘 뛰어?"
"에이. 아빤 러닝클래스에서도 체력 바닥에 속하는 걸? 잘 뛰는 사람들 너무 많아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한 즐겁게 뛰고 있어."
"사실 아빠가 대회 나간다고 하고 달린다고 해도 어느 정도인지 몰랐는데 내가 뛰어보니 알겠더라. 남자애들 중에 잘 뛰는 애들도 있는데 내가 우리 아빠가 이 정도 뛴다고 하니 다들 놀라더라고. 대단하다고."
우쭐해져서 한 마디 질문을 던진다.
"그럼 너희 중에 풀코스나 하프 정도 장거리 뛰는 아이도 있니?"
"아니. 그냥 짧게 뛰는 거고, 그렇겐 못 뛰어."
"그렇구나. 하기야 거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즐겁게 뛰는 게 중요하지. 너무 거리랑 속도에 집착하면 재미가 없고 일이 되니까."
광교호수공원에 들어섰다. 천천히 달리는데 딸아이가 옆에서 잘 달리고 있다. 신기해서 물었다. "너 전보다 잘 뛰는 것 같아." 씩 웃는다. "뭐 요즘 그래도 조금씩 뛰었으니까." 전에는 1km 정도 뛰면 힘들다고 걸었다가 또 뛰었는데 지금은 지친 기색이 없다. 밤 10시 넘어 나와서 뛰는 것도 몇 년만이고 게다가 사춘기 딸이 불러서 나가서 뛰기도 몇 년만이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것저것 수다를 떨고 아이의 말을 듣다 보니 신대호수에서 원천호수로 넘어가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아이에게 말했다.
"오르막길 나오는데 힘들어도 천천히 가볼래?"
"응. 가볼게."
"아빠는 이 오르막길을 러닝 클래스에서 10~15번 전력질주로 올라가는 훈련을 해."
"휴. 너무 힘들겠다. 근데 그걸 다 해?"
"응. 혼자는 힘든데 여럿이 같이 하면 하게 되더라."
"그렇구나."
"가끔 큰일이 있고 용기가 필요하면 아빤 새벽에 이 오르막길을 한 번이라도 전력질주하곤 해. 올려다보면 두렵고 피하고 싶지만, 한 번만 끝까지 안 쉬고 뛰면 웃음이 나와. 이 힘들 걸 해낸 내가 뭘 못하겠냐고. 너도 걱정이 생기면 딱 한 번만 이 오르막길을 전력질주해 봐. 진짜 도움 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고마워."
달리다 보니 어느새 두 번째 언덕을 지나 원천호수로 들어섰다. 이야기하다가 가끔은 천천히 가끔은 속도를 내어 달리다 보니 어느새 5km를 넘겼다.
"와. 너 많이 늘었다. 5km를 안 쉬고 뛰었어. 진짜 대단하다."
아이가 씩 웃더니 혼잣말처럼 툭 던진다.
"어. 나도 좀 그런 것 같아. 나도 대회도 나갈 수 있을까?"
"응. 충분해. 어렵지 않은 대회 있으면 아빠가 알아볼게. 같이 나가볼래?"
"응. 그럴게."
3주가 지난 어제 단톡방에 수원국제하프마라톤 대회 소식이 떴다. 접속이 안된다는 말을 흘려 넘겼다. 늦은 저녁 다시 들어가 보니 이미 하프, 10km는 마감이다. 서울이 아닌 수원이라 가는데 힘들지 않은 대회. '이곳을 아이들과 첫 오프라인 대회로 하면 어떨까?' 아직 5km 코스는 남아있었다. 그래, 누가 러너들이 5km 뛰려고 대회에 나가겠나. 나 같아도 최소 10km, 아니 하프 이상은 뛰려고 나가니까. 새벽부터 그 고생을 해서 금방 끝나는 건 아쉬우니까. '10km는 뛰어야 하지 않을까...' 아쉽다.
아이들에게 톡을 보냈다.
"우리 셋이 5km 대회 나갈까? 내년 2월 22일. 수원. 너희 좋으면 우리 같이 나가보자. 가까우니."
중3 둘째가 먼저 답했다.
"나는 좋아."
톡을 안 보는 첫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마라톤대회 나가볼래? 수원이고 내년 2월 말인데, 5km라 금방 끝나. 10km 코스도 있는데 이미 마감이라."
"어휴. 10km는 뛰지도 못해. 나도 5km 대회 나갈래."
"정말? 그럼 우리 세명 이번에 같이 뛰는 거다. 신청할게."
처음 단체로 신청했다. 단체명은 책이름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신청 후 입금까지 마쳤다. 달린 지 5년이 지나니 이런 날이 온다. 100km 울트라보다 더 소중한 5km 대회. 대학생 딸과 사춘기 딸과 함께 나가서 달리고 메달을 걸고 행복하게 사진 찍는 모습을 떠올린다. 뭐든 억지로 되는 건 없다. 최선을 다하고 삶에게 온전히 나를 맡기기로 했다. 삶은 언제나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고, 나를 위해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