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후재즈수업] 이거 죽이지?

공자는 왜 악(樂)을 중시했나

by 이락 이강휘

어제 수업시간에는 쿨재즈를 소개했다. 수업은 대개 이렇게 진행된다. 먼저 쿨재즈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후에 해당 뮤지션을 안내한다. 아이들은 책(<오감재즈>)을 펴서 그들을 다룬 내용을 읽고 그중에 한 명을 골라둔다. 다음 시간에는 그들과 관련된 재즈감상문을 쓴다. 뮤지션을 소개할 때는 그들의 음악적 경향을 이야기하고 대표곡을 1분 정도 짧게 끊어 들려준다. ‘쳇 베이커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았어. 자, 대표곡 한 번 들어보자.’ 이런 식이다. 어제 선곡은 이랬다.


쳇 베이커: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데이브 브루벡: Blue Rondo a La Turk
빌 에번스: Waltz for Debby
스탄 게츠: The Girl from Ipanema


아이들은 음악을 듣고 느낌이 통하는 한 명의 뮤지션을 선정하여 책을 자세하게 읽는다. 물론 책을 다 읽고 선정하는 아이들도 있다.

설명이 끝나면 독서 시간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설명을 위해 끊었던 음악을 쭉 들려준다. 그럼 지들끼리 “이거 괜찮다.” 하거나 “난 쳇 베이커 할래.” 이런다. 물론 잠에 빠져드는 애들도 있다. 오해 마시라. 이 아이들이야말로 수업에 꼭 필요한 학생들이다. 그래야 내가 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자는 아이를 정신없이 깨우려 다녀야 수업시간에 놀고 있다는 내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다. 자는 아이가 없으면 나는 한 시간 동안 음악만 듣다가 가야 하는데 아직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다행이다.


한창 혈기왕성한 아이들이 가만히 앉아서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만 듣고 있는 건 꽤 힘든 일이다. 게다가 영상도 아닌 활자를 봐야 하니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다. 그러니 40분 정도 지나면 애들이 지쳐한다. 내심 ‘이노무 자슥들이, 멍하니 앉아 있을 바에야 다음 시간에 쓸 글감이나 모으지.’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인 걸 잘 알고 있어서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시간이 되면 주제와는 상관이 없는 곡을 예고 없이 들려준다. 대개 대중성이 있는 곡을 선곡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생기가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어제는 칼라 블레이 Carla Bley의 ‘Lawns’를 들려줬다. 가라앉았던 교실 분위기가 살짝 바뀐다. 뒤에 앉았던 한 아이가 “선생님, 이 곡 제목이 뭐예요?”라고 묻는다. ‘Lawns’는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에 저녁 즈음이나 밤늦게 퇴근할 때 차 안에서 자주 듣는 음악인데, 아이들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한껏 상기되어서 “이거 죽이지?”라고 말했더니 씩 웃는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평소에도 그다지 웃는 상은 아니지만 특히 수업 때에는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다. 아이들이 써준 롤링페이퍼에 제일 많은 말이 ‘좀 웃어주세요.’이다. 나는 ‘니들 보면 웃음이 나겠니?’ 하지만 실은 그런 이유는 아니고, 아이들 앞에 서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내 감정을 숨기는 것으로 표출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곡 죽이지?’라는 말을 뱉어 놓고는 혼자서 내심 꽤나 놀랐다. 학생들 앞에서 무표정의 가면을 벗고 긍정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해 본 게 언제였나 싶다. 나도 모르게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게 만든 힘. 그래서 공자가 그렇게 ‘악(樂)’을 중시했나 보다.(아니면 말고.)



재즈 수업이 끝나간다. 생각 같아서는 조금 더 하고 싶은데 더 이상 글을 쓰게 하면 아이들이 집단 파업을 결의할 것 같아 두려워서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일주일에 두 번씩 공식적으로 입시에서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이제 무슨 낙으로 학교를 다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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