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락 이강휘 Aug 25. 2021

쌓여 있는 그릇을 설거지하며 듣는 재즈

<I’ll Close My Eyes>, Blue Mitchell

요리를 못하는 사람일수록 설거지거리가 많은 법이다. 글 못 쓰는 사람의 원고지가 지저분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두 문장을 쓰는 데도 족히 이만 번은 고친 나 같은 사람은 애초에 원고지를 쓸 엄두조차 못 낸다. 뭘 썼는지 알아볼 수나 있으려나.

(당연하게도) 글 솜씨만 부족한 건 아니다. 요리에는 젬뱅인데다가 게으른 천성까지 보태져 요리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지치고 만다. 근데 백종원 씨의 요리법은 워낙 쉬워(보여)서 그의 유튜브 채널을 보고 있노라면 어처구니없게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는데?’하는 근본 없는 자신감이 솟구친다. 내친김에 큰맘 먹고 요리를 시작하면, 대체로 미안해야 할 일이 생긴다. 식재료가 아까워 어쩔 수 없이 먹어 치워야 하는 식구들, 요리법을 알려준 백종원 씨, 그리고 식재료를 만드느라 불철주야 애를 쓰신 수많은 농부, 어부, 유통관계자 여러분들 등등등. 모두들 죄송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다. 일을 벌인 다음이면 안 그래도 좁아터진 주방이 초토화된다. 집에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죄다 나와 있고 여섯 개가 넘는 숟가락, 그것보다 더 많은 젓가락이 그릇 사이사이에 꽂혀 있다. 기름을 닦아낸 키친타월은 개수대 위에 뭉쳐져 있고 딴엔 깔끔 떤답시고 끼고 벗었던 비닐장갑 여럿은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있다.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이 꼴을 봤다면 사건 현장쯤으로 여길 법한 장면이다. 

더 이상 식구들에게 미안할 일을 만들 수는 없으므로 이 '현장'은 내 손으로 직접 수습해야 한다.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쉰 후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한다. 꽤 길고 힘든 시간이 될 테니 선곡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너무 빠른 템포의 곡은 안 된다. 템포에 끌려가서 페이스를 잃어버리면 중간쯤에 포기하게 될 테다. 식기세척기도 못 들여놓는 처지에 설거지마저 포기하는 나약한 남편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너무 느려서도 안 된다. 음과 음 사이의 벌어진 틈새를 타고 ‘내가 고작 이 고생하려고 요리를 한 게 아닌데’으로 시작해 백종원 씨에 대한 원망, 그리고 ‘나는 왜 이따위로 존재하고 있는 건가’로 이어지는 비관으로 빠져들 수 있다. 고작 설거지 때문에 우울해지고 싶지는 않다.

적당히 어깨를 들썩이고 발을 까딱거릴 수 있는 박자에 혼(horn)이 들어간 콰르텟이었으면 좋겠다. 설거지엔 아무래도 피아노 트리오보다는 트럼펫의 그루브가 제격이다. 휴대전화 스크롤을 이리저리 넘겨보다 블루 미첼(Blue Mitchel)의 <Blue's Moods>에서 멈춘다. 홀로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처지인 터라 빛바랜 파랑 위에서 트럼펫을 부는 고독한 사내에 순간적으로 감정 이입되어 버린다. 손에 쥔 담뱃갑, 부유하는 담배연기도 운치가 있다.

첫 곡 ‘I’ll Close My Eyes’을 누른다. 경쾌한 피아노와 가벼운 베이스의 울림이 마음에 든다. 이윽고 블루 미첼의 정갈한 트럼펫이 곡으로 진입한다. 이거다! 이 정도면 수세미에 세제를 묻힐 맛이 난다. 부드러운 프레이즈로 연주를 이어가는 트럼펫 솔로에 마음이 가볍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리듬 속에서 푹 빠져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양념이 그득그득 묻은 그릇을 하나씩 꺼내 들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멜로딕한 트럼펫 연주가 끝나면 윌튼 켈리(Wynton Kelly)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통통 튀듯 곡을 거니는 워킹 베이스를 타고 춤추는, 발랄한 피아노에 맞춰 거품 묻은 그릇을 물로 씻어낸다. 성에 차지 않으면 손을 대어 뽀득거릴 때까지 문지른 후 건조대에 올려둔다. 물이 잘 빠지도록 겹치지 않게 신경을 쓴다. 하지만 개수대에는 아직 남은 설거지거리가 가득이고 기름 먹은 프라이팬도 가스레인지 위에 놓여 있다. 다시 한숨이 나온다. 아, 먹고사는 거 쉽지 않다.


유명 예능프로그램 <삼시 세 끼>를 보면 먹고사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을 위한 식재료를 구하고 점심 먹고 나면 저녁에 뭘 먹을지 고민한다. 쉽게 말해 먹는 것 걱정만 하다 하루가 끝난다. 챙겨 먹은 음식만큼 설거지거리도 꼬박꼬박 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리하는 장면에 비해 설거지의 비중은 아무래도 적다. 단순 반복되는 설거지로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적절치 않기 때문일 테다. 설거지가 늘 뒷전으로 밀리는 신세인 건 방송에서만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주방 위계 체제에서 가장 아래는 설거지 담당 차지였다. 요리 담당인 차승원 씨가 설거지를 도맡는 손호준 씨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 건 비단 그가 연장자이기 때문이 아닌, 오랜 역사의 산물인 셈이다. 



장 바티스트 시에몽 샤르댕, '설거지하는 하녀(The Scullery Maid, 1738)

예상컨대 샤르댕(Jean-Baptiste-Siméon Chardin)의 그림 속 저 여인은 부엌에서 지위가 가장 낮은 하녀였으리라. 고급스러운 은식기나 와인잔이 아닌, 냄비 같은 조리도구를 씻고 있는 걸 보면 설거지 담당 중에서도 가장 낮은 서열이었을 것이다. 온갖 서러움을 받아가며 자신은 평생 맛보지도 못할 요리를 치웠을 처지임이 분명할 텐데도 그녀의 얼굴에서 좌절감이나 우울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세는 꼿꼿하고 표정은 당차다. 휘파람을 부는 듯 둥글게 모은 입술로 조리도구를 닦는 모습, 귀찮고 하찮은 일로 치부되는 설거지를 하는 그녀가 결코 하찮아 보이지 않는 이유다. 


싱크대 주변 물기를 행주로 훔치는 걸로 길었던 설거지를 마무리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그릇 건조는 주방에 난 작은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맡긴다. 내내 틀어놓은 더운물로 송골송골 맺혔던 땀이 콧잔등을 타고 내려온다. 더운 생명력. ‘아, 나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과 만족감이 밀려온다. 다시 블루 미첼의 트럼펫에 귀를 기울인다. 그의 명징한 연주를 듣고 있으니 깔끔하게 내린 커피가 당긴다. 콜롬비아 싱글 오리진 커피를 내리며 우리 집에서 내 서열을 생각해본다. 그림 속 여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다. 비로소 내 본분을 깨닫는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아내에게 맡겨야겠다. 




Blue's Moods(Riverside)

Blue Mitchell(Trumpet) 

Wynton Kelly(Piano)

Sam Jones(Bass) 

Roy Brooks(Drums)



재즈 좋아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