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회화의 대표 화가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의 <생 라자르 역(Gare Saint-Lazare)>은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근대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우리는 19세기 파리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멀쑥하게 차려 입은 신사가 회중시계를 열고 양산을 든 숙녀가 고개를 내민다. 멀리서 증기기관차가 뿜어내는 거대한 연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내 기차는 소란스럽게, 하지만 천천히 역으로 몸을 들인다. 인류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던 시점. 하늘을 울리던 경적은 새 시대로 진입한다는 걸 알리는 일종의 신호였을까.
<생 라자르 역>, 클로드 모네
근대가 열리자 거의 모든 예술분야에서 고전과 작별하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정확한 도식과 표현법으로 역사화와 종교화를 그리던 프랑스 아카데미학파에 염증을 느낀 에두아르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식사>로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렸고 첫 번째 아해부터 열세 번째 아해까지 줄기차게 도로를 질주하는 걸 활자로 옮겨 써 당시엔 수많은 문인들의 머리를, 지금은 더 많은 수험생들의 뇌를 쥐어짜게 만든 이상의 <오감도>도 전통시와의 차별을 꾀했던 모더니즘 문학으로 분류된다. 패션의 일가견이 있는 멋쟁이들에게 모던은 귀족들의 화려한 의복에서 벗어나 깔끔하고 청결한 셔츠와 슈트를 지향했던 댄디즘이다. 우리가 모던이라는 말에서 기대하는 세련미와 도회적인 이미지는 보 브롬멜(Beau Brummell)이 만들어낸 이 댄디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몽테스키외 백작의 초상>, 지오반니 볼디니
다른 예술에 비해 다소 시기가 늦었지만 재즈 역시도 모던의 굴곡을 겪는다. 재즈의 모더니스트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은 재즈를 춤을 위한 배경음악 정도로 여겼던 당시 인식이었다. 이들은 스윙 빅밴드 단원이라는 굴레에 묶인 자신들의 처지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무기는 즉흥연주(임프로비제이션(improvisation)). 자신들의 연주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길고 복잡한 연주를 통해 대중들에게 재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가 ‘재즈’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도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Strasbourg St. Denis’는 모던재즈의 전형이다. 재즈를 잘 모르더라도 듣자마자 ‘재즈로군.’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악기의 구성과 진행, 정제되어 있으면서 품위를 잃지 않는 즉흥연주. 곡 전반에서 차분하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 신사의 품격이 배어 있다.
자, 이제 재즈계의 보 브롬멜을 만나보자. 플레이버튼을 누르자마자 묵직한 베이스가 우리를 맞는다. 뒤이어 살짝 얼굴을 내미는 피아노와 드럼 스틱이 브라스를 불러낸다. 함께 발걸음을 맞춰가는 트럼펫과 색소폰. 사이좋은 두 악기가 쌓아올린 하모니를 피아노가 경쾌하게 받아내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앙증맞은 피아노 솔로가 끝나면 로이 하그로브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으로 곡을 절정으로 이끈다. 이어 곡을 끌어안은 저스틴 로빈슨(Justin Robinson)의 알토가 잘 정돈해 고스란히 퀸텟에 넘겨준다. 이후 처음 들었던 멋들어진 테마가 반복되며 곡은 마무리된다.
테마에서 시작해 순차적으로 악기의 솔로가 이어진 후 테마로 돌아오는, 모던재즈의 전형적 구성이다. 전형이라는 말에 오해하지 마시길. 전형이라 하면 진부하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지만 이 곡에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이 곡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좋은 스페셜티(specialty) 커피를 마신 것 같은 황홀감에 사로잡힌다. 잘 정제된 즉흥연주과 그루브 덕분에 곡을 듣고 나서도 마치 커피를 마신 후 입안에 은은하게 맴도는 후미(後味)같은 진한 여운이 느껴진다. 그래서 곡이 끝나면 다시 플레이버튼 쪽으로 자연스럽게 손이 가게 되는 것이다.
기차가 더 이상 신문명이 아니듯, ‘모던’ 역시도 이제는 새로운 가치가 아니다. 전자음만으로 한 곡을 가득 채워 만들 수 있는 시대에서 모던재즈 역시 그 신선함을 잃은 지 오래다. 오히려 어쿠스틱한 사운드로만 채워진 모던재즈를 ‘정통 재즈’라 부르는 시대에 우리는 산다. 이런 시대에서 하그로브는 증기기관차가 진입하는 생 라자르 역을 그려냈던 19세기 말 모던 시대의 모네를 흉내라도 내듯이 스트라스부르 생 드니 역의 모습을 재즈로 그려낸다. 굳이 파리의 지하철역을 곡명으로 정한 건 ‘기차’라는 상징을 통해 모던재즈를 향한 향수를 풀어내는 로이 하그로브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어디에서 듣든 어울리는 곡임은 분명하지만 기왕이면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 있는 한적한 지하철 안에서 들어보시길. 굳이 댄디한 옷차림이 아니어도 좋다. 슬리퍼를 신고서도, 트레이닝복 차림이어도 전혀 문제될 것 없다. 이어폰을 타고 들려오는 ‘Strasbourg St. Denis’의 그루브가 개성 넘치고 열정이 가득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역의 분주함, 그러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파리의 어느 곳에 다다르게 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