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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Sep 06. 2021

흰여울문화마을에있는 작은 카페에 앉아 듣는 재즈

<Well You Needn’t>, Thelonious Monk

살다 보면 후회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때 같은 강의실에 홀로 수업을 듣던 그녀에게 다가가 전화번호를 물었어야 했고, 재수 없게 굴던 상사의 눈은 가차 없이 찔러버렸어야 했으며, 처음 네이버 메일을 만들 때, 주식도 같이 샀어야 했다. 그리고, 십여 년 전 영도 바다가 보이는 그 허름한 주택을 구입했어야 했다.

나라는 인간이 본래 한 치 앞을 못 보긴 한다. 영도 사는 친구를 늘 섬나라 사람이라고, 배 끊기면 집에 못 가니 일찍일찍 들어가라며 놀려댔던 내가 영도 출신 아내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군다나 영도에 매료된다니. 어이쿠,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근데 부산 아이들의 영적 고향이자 출생의 비밀을 품고 있는 영도다리(부산 아이들의 태반은 영도다리에서 ‘줏어온’ 애들이지요.)를 빼고서라도 영도는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품은 채로 바다 위에 조용히 자리 잡은 도시.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봉래산을 아우르는 골목길을 올라가면 어디서든 탁 트인 바다를 실컷 볼 수 있었다. 작지만 정갈한 집들이 아옹다옹 모여 있는 골목은 오래된 동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함과 운치가 있었다. 

출처: 부산일보 2021.1.31자(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1013119240281043)

하루는 골목길에 자리한 낡은 주택을 보고 아내에게 말했다.

“여기 작업실을 만들면 어때요? 얼마 안 할 것 같은데. 바다도 보이고 좋네요. 가끔 커피도 팔고. 손님 없으면 글 쓰고.”

부동산 벽에 붙은 주택 가격을 보니, 자신감을 보여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은퇴해서 쓸 작업실을 굳이 지금 구입할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그리 급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 안달 내지 않아도 된다고. 몇 년이 지나도 여긴 이대로 일 거야. 여긴 영도잖아.’

근데 불과 몇 년 만에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멋들어진 카페가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각종 음식점, 잡화점들이 줄줄이 생겼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건물이 골목 예술가들의 작업실 겸 전시장으로 변신해 손님들을 맞이했다. 거리엔 낯선 말투의 외지인이 몰려들어와, 원주민들이 부르는 ‘이송도’라는 이름 대신 ‘흰여울문화마을’이라는 힙한 이름이 적힌 간판 아래에서 사진을 찍어댔다.

점찍어두었던 주택 역시 정갈한 카페로 변했다. 어깨너머로 보니 많은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커피를 기다리고 있다. 모두 내가 놓친 고객들인 것만 같아 속이 쓰리다. 얼마나 맛있나 보자, 하는 못된 심보로 창가 쪽에 자리를 잡는다. 바다를 보며 마시는 커피는 역시… 썼다. 그럼 그렇지, 이건 내가 했어야 했다고! 쓰린 속을 부여잡고 이어 버드를 꽂는다.   


델로니어스 멍크의 피아노는 당시 여느 피아니스트와는 달리 투박하다. 아트 테이텀(Art Tatum), 버드 파웰(Bud Powel) 등 유수의 속주 연주자들이 속출했던 시대에서 그는 음 하나하나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짚어내는 느린 연주로 자신만의 밥(Bob)을 완성해나갔다. 느릿느릿 마치 술에 취한 듯. 제때 누르는 걸 놓쳤다가 아차, 하고 뒤늦게 누르는 듯하게.

멍크가 작곡한 ‘Well You Needn’t’는 도입부에서의 강렬한 멜로디와 웅장한 사운드만으로도 충분히 즐겁지만 협주에서 들려주는 멍크의 피아노가 더 재밌다. 음과 음 사이의 공백으로 만들어지는 긴 여백이나 존 콜트레인과 콜먼 호킨스의 진지하고 엄숙한 색소폰 연주 사이에 한 음씩 장난스럽게 던져 넣는 피아노가 독특한 감수성을 만들어낸다. 한동안 멈춰서 있다가 ‘뭐가 잘못된 건가’ 싶을 때 한 번 툭 던져주는 무심한 건반은 언뜻 듣기 불협화음 같지만 그다지 어색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멍크의 음악은 그림으로 음악을 연주하고자 했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그림과 닮았다. 수많은 곡선과 원, 선과 선이 만나 면을 만들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곡선이 피어난다. 점을 중심으로 선들이 모였다 다시 흩어진다. 구체적인 형태를 일절 배제한 채 오직 색과 선과 면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통해 자신 안의 세계를 구현해 낸다. 그리고 감상자는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세계에 빠져든다. 마치 ‘이 굼뜨고 게으른 피아노는 뭐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멍크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처럼.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1923)

같은 부산 바다라고 하더라도 영도의 바다는 휴양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해운대나 광안리의 바다와는 결이 다르다. ‘깡깡이 마을’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배를 수리하는 조선소가 즐비해 있는 영도의 바다는 들뜬 분위기가 없다. 그래서 그럴까. 생계형 섬인 영도는 여행객의 달뜬 마음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었다. 

그런 나와 달리, 있는 그대로의 영도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 몇몇 이들은 정박된 대형선을 품고 있는 영도 앞바다 앞에 개성 강한 카페를 꾸렸다. 날것의 영도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한껏 차려입은 채 낡은 골목길을 걸으며 수다를 떤다. 그들은 마치 콜트레인의 색소폰에 투박한 음들을 뿌려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멍크의 피아노처럼, 투박하고 낡은 길 위에다 개성을 발휘하여 영도를 그들의 장소로 만들어낸다. 불협화음 같은 여러 요소들이 만나 새로운 영도의 향취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카페에 앉아 멍크를 듣던 나는 이제 생각을 바꾸기로 한다.

'그래, 어차피 작업실을 쓸 만큼 대단한 작가도 아니잖아. 글 쓴답시고 괜히 작업실 만들어서 안 써지면 더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 아니야. 나에겐 이렇게 예쁘게 작업실을 꾸밀 미적 감성이 없어. 기껏해야 저 구석에 칸딘스키 레플리카나 걸어두고 흡족해 했겠지. 게다가 영도의 매력을 발견한 사람이 많으니 얼마나 좋아. 덕분에 몇 발만 내딛어도 멋진 카페에 들를 수도 있고, 사람 구경하는 맛도 있고.'

이젠 더 이상 예전 가격으로 이 주택을 구입할 수는 없겠지만, 여긴 나보다 이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공간인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아까와 달리 이 집 커피도 그럭저럭 맛있는 것도 같다. 

때론 신포도가 단 법이다. 



Monk’s Music(Riverside, 1957)

Thelonious Monk (piano)

Ray Copeland (trumpet)

Gigi Gryce (alto saxophone)

Coleman Hawkins / John Coltrane (tenor saxophone)

Wilbur Ware (bass)

Art Blakey (dru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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