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간 거의 매일 달렸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랄까. 정말이지 나도 이럴 줄 몰랐는데, 어느새 흔히 사람들이 중년이라 부르는 나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그놈의 나이는 언제 이렇게 착실하게 먹어댔는지.) 그러자 슬슬 몸에서 제발 좀 움직이라는 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허리, 어깨, 목 등에서 간헐적인 통증이 시작되었다. 다리 쪽은 좀 더 심각해서 불현듯 찌릿찌릿 저려오는 증상이 계속되었다.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저려오자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병원으로 가 검사를 받았다. 안내에 따라 우주선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이 생긴 캡슐 앞에 눕자 간호사가 내 몸을 그 속에다 집어넣었다. 정체모를 레이저가 잔뜩 쏟아지는 원통 안에서 나는 외계인에 납치당한 지구인처럼 꼼짝없이 누워있었다. 잠시 후 CT를 빤히 바라보던 의사는 ‘이상근’이라는,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의 근육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그리곤 이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환자분, 이제 운동하셔야 할 나이예요.”
값비싼 우주 레이저 찜질로 내가 비(非)운동권(?)의 마지노선에 서 있었음을 확인한 나는 집 앞에 곧게 뻗은 산책로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부터라도 좀 달려야겠다.
난생처음 러닝화라는 물건을 사고 일상이 아닌 운동을 위한 운동복을 구입해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초반의 어려움을 넘어서 꾸준히 달리자 증상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점차 달리기가 몸에 붙기 시작하니 슬슬 속도에 욕심이 생겼다. 기록 단축을 위해 (아내 몰래 운동용 이어폰을 샀고) 러닝용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하루키도 말했지만 러닝엔 재즈보단 록이다. 그린데이의 ‘Basket Case’를 들으며 기록을 단축시키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러닝 플레이리스트에 재즈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요령 없이 빨리만 달리려 하다 보니 결국 몸에 무리가 왔다. 달리는 근육이 채 만들어지기도 전에 기록 욕심을 부리니 무릎에 탈이 난 것이다. 병원에 갈 만큼 심각하진 않았지만 불안해서 빨리 뛸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제 줄어드는 페이스를 보면서 혼자 흐뭇해하는 건 끝이라고 생각하니 몹시 씁쓸했지만 달리기를 포기할 순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속도를 늦춰 뛰어야 했다. 오랜만에 재회한 록과도 작별해야 했다. 자꾸만 발을 재촉하는 록 비트는 느린 러닝에는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음악을 바꿔야겠다는 마음이 들자 그제야 비로소 재즈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천천히 뛴다 하더라도 비트가 없이는 달리는데 크게 도움이 되질 않으니 피아노 솔로는 난감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혼(horn)은 달리는 리듬을 흐트러뜨릴 수 있으므로 색소폰이나 트럼펫 역시 곤란했다. 핸드폰을 스크롤하며 피아노 트리오를 탐색했다. 적당한 비트에 과하지 않은 스윙. 나는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 Trio) 트리오의 앨범 <Where Do You Start>을 열었다. 그리고 즐겨 듣던 첫 곡 ‘Got Me Wrong’과 나의 새 러닝 페이스와의 궁합에 대해 생각했다.
(번역 투로)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뛰지 못할 만큼 느리지도 않은, 이 리드미컬한 템포가 내 무거운 러닝을 가볍게 이끌어 줄 테지. 원곡이 록이었으니 비트도 적당하고 말이야. 오호, 공간을 꽉 채우는 래리 그레다니어(Larry Grenadier)의 저 베이스 좀 보라지. 멜다우의 저 감성적인 즉흥연주는 또 어떻고. 이 가을날의 러닝과 더없이 잘 어울리지 않느냔 말이다.
왠지 이 곡이라면 속도를 높이지 않아도 달리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멜다우의 리드미컬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발걸음을 뗀다. 드럼의 비트에 맞춰 한 발 한 발 가볍게 뛰어본다. 베이스의 울림에 맞춰 발바닥을 땅에 디딘다. 지면에 발바닥 전체를 놓으려 노력한다. 그래야 무릎이 덜 상한다고 배웠다. 보폭을 너무 넓게 잡으면 그만큼 충격이 커질 테니 적당한 보폭으로 땅을 밀어낸다. 무거웠던 몸이 조금씩 살아난다. 걸을 때보다 바람이 한층 시원하다. 살짝 들뜬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속도를 높인다. 그러자 스마트워치가 속도를 줄이라고 지적한다. 난 잔말 않고 기꺼이 그 명령에 따른다. 들려오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천천히 페이스를 낮춘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를 되뇌며 호흡을 끝까지 유지한다. 이런 상태라면 목표치까지 완주하고도 가벼운 기분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코모 발라,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1912)
지금껏 내게 달리기란 최대한 빨리 뛰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상상만큼 빠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몸에 무리를 줘 가며 속도에만 집착했다. 뛰고 나면 기진맥진했으며 달리기만으로 하루 기운을 다 써버린 느낌이 들었다. 짐작건대 아마 내가 뛰는 모습은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의 그림 속 발발거리는 강아지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였을 것이다. 대상의 역동성과 속도감을 평면에 구현해내겠다는 열망을 위트 있게 그려낸 발라와는 달리 속도감에 빠져 그럴듯한 결과물도 못 낸 채 부상에 시달리는 우스운 꼴을 당할 뻔했다. 마침 운이 좋게 무릎이 신호를 줬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한동안 달리기를 쉬어야 할 만큼의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의 적절하게 내 과한 욕심을 인지하게 해 준 무릎을 아끼는 마음으로 나는 보다 천천히 뛰어야할 것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걷는 것보다 약간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굴리는 노인과 등산복을 깔 맞춰 입고 대화를 나누며 걷는 아주머니들이 보인다. 산책로 사이에 설치된 운동기구에 매달려, 그 기구를 설계한 사람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을 기묘한 자세로 몸을 푸는 아저씨도 보인다.
느리게 달리기 전 난 그들을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했었다. 왜 속도를 낼만 하면 나타나서 페이스를 끊어놓느냐고 속으로 불평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고 그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자, 이 불만들은 모두 나의 조급함에서 비롯된 오해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살기 위해 꼭두새벽에 나와 뛰어야 했던 것처럼, 저들 모두 각각의 사정으로 운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름의 페이스로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의도적으로 나를 방해할 수고를 들일 리 없다. 어쩌면 그들에게 나 역시도 갑자기 등 뒤에 나타나 길을 비켜달라고 시위하며 그들의 페이스를 흔드는, 땀에 전 검은 짐승 같지 않았을까.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미안해진다. 사과하는 마음으로 나는 재생 버튼을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