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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May 20. 2021

오지 않을 눈을 기다리며 듣는 재즈

<Glad I Met Pat>, Duke Jordan

두터운 외투를 입고 다녀야 하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군불을 때워 놓은 방에 서 이불에 몸을 싸고 있을 때 느껴지는 이불의 촉감이라든가 발이 따뜻해지면 찾아오는 나른한 낮잠의 유혹도, 창문을 열면 쑥 하고 들어와 상쾌하게 뺨을 스치는 찬바람도 좋다. 추위 때문에 사람끼리 거리가 좁혀지면서 만들어지는 묘한 기대감도 겨울이 주는 선물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겨울의 꽃은 눈이다. 내가 사는 곳은 눈 구경하기 힘든 곳이기에 이곳 거주민들은 대부분 눈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다. 군인이었던 시절에는 눈이라는 걸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불청객(무려 식목일에도 눈이 내렸다.)' 정도로 여기던 적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던가.(엥?) 통 보질 못하다 보니 섭섭한 감정은 그야말로 눈 녹듯 사라졌고 이제는 겨울이면 한 번쯤은 집 앞 주차장이 하얗게 수놓아진 장면을 실제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알프레드 시슬레, <루브시엔느의 설경>(1878)

알프레드 시슬레의 <루브시엔느의 설경>에 자꾸만 눈이 가는 것은 일종의 부러움 때문일 것이다. 내린 눈의 무게를 힘겹게 버티고 있는 나뭇가지나 담장 위를 흘러내릴 듯이 눈이 쌓여있는 장면은 내게는 판타지 같은 풍경이다. 하얀 눈길을 따라 가다보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여인도 시선을 끈다. 아직도 눈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회색빛 하늘에 가려진 먼 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도 나처럼 오랜만에 보는 눈에 들떴을까. 아니면 자비 없는 겨울 추위에 오슬오슬 떨고 있을까.

Glad I Met Pat, Take3

이 질문에 답을 하는 듯한 재즈가 있다. 하얀 설원에 멀뚱히 서 있는 앨범 재킷처럼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인 피아노 선율로 가득 채운 곡, 듀크 조던의 <Glad I Met Pat, Take3>. 마치 얼음 위를 걸어가듯 조심스럽게 거니는 피아노로 곡이 시작된다. 베이스가 든든하게 곁을 지키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미끄러질 듯 위태롭게 내딛던 발걸음이 이내 경쾌해진다. 이 곡을 들으며 떠올리는 <루브시엔느의 설경> 속 여인은 패트릭(Pat)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무도 밟지 않는 눈밭 위에서 들뜬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할 줄 아는 앳된 소녀이다.

Glad I Met Pat, Take4

연주하는 테마는 같지만 ‘Take3’보다 한층 늦춰진 템포로 연주하는 ‘Take4’에서는 보다 성숙한 여인이 떠오른다. 그녀는 더 이상 하얀 눈밭 위에서 자신의 감정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소녀가 아니다. 대신 설렘이 가득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어깨를 흔들거나 발을 까딱일 수 있는 감수성만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 벅찬 설렘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하얗게 눈이 쌓인 풍경, 뺨에 부딪히는 겨울의 찬 공기, 까슬한 코트의 감촉의 소중함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욱한 눈안개를 바라보면서도 눈처럼 하얀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정적인 풍경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속도감 있는 붓질은 즉흥연주라 믿기 어려울 만큼 서정적인 듀크 조던의 생동감 넘치는 피아노 연주와 닮았다. 눈을 한껏 머금고 있는 회색빛 하늘, 바닥을 덮은 하얀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흰색 외에도 파랑, 검정, 노랑 등 다양한 색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볼륨을 높여 베이스와 드럼 연주에 귀를 기울여보시길. 날랜 움직임으로 능숙하게 피아노를 보듬어가는 두 악기의 음색이 그림 속 색채와 닮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세 명의 트리오의 인터플레이로 만들어내는 <Glad I Met Pat>을 들으며 감상하는 <루브시엔느의 설경>에서, 겨울의 애수와 고독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눈 내리는 풍경과 하나가 된 여인의 모습에서 겨울의 낭만을 떠올린다면 또 몰라도.

알프레드 시슬레, <루브시엔느의 눈길>(1878)

지금까지 경험해온바, 크리스마스에 절대 오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 산타클로스 그리고 눈.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라는 뉴스는 항상 오보로 끝났고, 그 현상은 올해에도 변함없이 일어날 일이라는 건 귀납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렇다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포기해야 할까.

매년 12월이 되면 산타에게 받아야 할 선물 목록을 ‘굳이’ 나에게 말하는 꼬맹이가 하나 있다. 그것도 반복해서 계속. 그러고 보면 이 녀석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다. 어른들의 말실수와 소통 부재로 인한 작전미스 들에서 산타가 오지 않는다는 정황 증거는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을 테니까. 오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다릴 수 있는 힘은 그것을 대체할 만한 무언가에서 온다. 내게 <루브시엔의 경>은 산타의 선물을 대신할 아빠 카드 같은 것이다. 눈이 안 오면 시슬레의 그림이나 구경하지 뭐,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면 그다지 지치지 않는다. 거기다 <Glad I Met Pat>의 테이크들을 배경으로 틀어놓는 상상이면 올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리 서운할 것 같지는 않다.



Flight to Denmark(Steeple Chase, 1974)

 Piano_Duke Jordan

 Drum_Ed Thigpen

 Bass_Mads Vi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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