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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Sep 09. 2021

비 내리는 가을날 전어를 맛보며 듣는 재즈

<Autumn Leaves>, Cannonball Adderley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 말을 이해하는 건 내 능력 밖이다. 감정이 무디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내가 남자가 아니거나. 가을이면 불현듯 찾아오는 고독감과 외로움 때문에 짝을 찾는 시도를 더 많이 한다고 하던데, 아직 젊은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 적 난 사시사철 연애를 하고 싶었다.(다들 안 그랬나요?) 만약 가을을 타는 것이 고독을 느끼는 걸 말하는 거라면 난 사시사철 가을을 탔다. 연애라는 게 내 마음대로 된 적이라곤 도통 없었으니까. 조금 슬퍼지려 하니까 이 얘긴 그만하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도 여기저기 산행을 가는 탓에 책 판매량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현상에 대응하는 마케팅의 일환으로 만들어낸 말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가을=고독의 계절’이라는 공식도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이브 몽땅(을 아시는 분은, 건강 유의하세요.)의 매력적인 노랫말이 배경음으로 흐르고, 고급 트렌치코트의 깃을 채운 채 비에 젖은 낙엽 위를 거니는 쓸쓸한 남자의 뒷모습. 이런 모습에 자주 노출되다보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어볼까? 가을이잖아! 고독의 계절!’하는 청승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다.

차일드 하삼, <비 오는 날의 5번가>(1893)

비를 사랑한 작가 차일드 하삼(Frederick Childe Hassam)이 <비 오는 날의 5번가>에서 그려낸 가을비는 미디어에 비친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우산을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걸어가는 여인에 눈이 간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거친 붓터치 덕분인지 찔러 넣은 그녀의 손 때문인지 그녀의 발걸음은 당당하고 거침없어 보인다. 때문에 홀로 걷고 있음에도 외로움이나 고독의 정서는 느껴지질 않는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얼핏 보이는 두 사람이 있다. 함께 우산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연인인 듯하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천천히 다정하게 걷는다. 여유 있게 걷고 있는 백마와 마차가 운치를 더한다. 타닥타닥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작품 전체를 감도는 갈색 계열의 색감이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인지 하삼의 가을비는 어둡지 않다. 비에 젖은 길에 비친 빛들에서는 생동감마저 느껴진다.

이브 몽땅(아까 언급된 그 분)이 불러 유명세를 탄 ‘Autumn Leaves’은 여러 재즈 뮤지션들에 의해 연주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버전은 아무래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세션으로 참여한 캐넌볼 애덜리의 버전이다.

발걸음을 연상케 하는 피아노와 베이스의 뱀프를 시작으로 마일스의 감각적인 연주가 시작된다. 아트 블레키의 부드러운 브러시 연주와 날카로운 음색에서 묘하게 묻어나는 서정적 멜로디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안정적인 베이스 위로 연주되는 캐넌볼의 색소폰과 뒤에 다시 이어지는 마일스의 트럼펫 연주를 들으며 리듬에 맞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림 속 연인들처럼 여유롭게 빗길을 거니는 듯한 행크 존스의 피아노의 솔로 연주는 손가락을 까닥이며 리듬을 타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 위대한 퀸텟은 가을이라는 계절의 색감을 살리되 통속적인 이미지에서는 살짝 벗어난, 그들만의 가을을 그린다. 좀 더 생기 있고 명징한 느낌이랄까. <비 오는 날의 5번가>를 보면서 캐넌볼의 ‘Autumn Leaves’을 떠올린 것은 단순히 이 곡이 가을을 대표하는 재즈 스탠더드 넘버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긴 가을장마에 햇빛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젠 영영 햇빛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세기말적 상상이 현실화될 조짐이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을 하면 좀 민망하지만 이런 가을이라면 ‘Autumn Leaves’ 할아버지가 와도 생기를 불어넣기는 무리지 싶다.

주변의 공기만큼이나 무거운 몸으로 꾸역꾸역 운전대를 잡고 집 앞에 다다랐는데 집 앞 횟집 앞에 ‘가을 전어’라고 적힌 현수막이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펄럭인다. 갑자기 눈이 번뜩 뜨인다. 그래, 가을은 전어지. 차를 세워 전어 한 관을 산다. 전어를 팔아치우려는 마케팅에 넘어간 거라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제 아무리 ‘가을=전어’이란 공식이 거짓이라 해도 전어회를 손에 쥔 내 심장의 이 거대한 두근거림, 이 발랄한 생기만은 진실이 아니던가. 아무려나, 그 말만은 기필코 속아주고 말리라.

당연히(!) 소주를 함께 사왔기 때문에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모녀에게 잔소리를 들었다.(회에 소주가 없으면 불법 아닌가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오늘 전어를 먹어야 한다. 왜냐고? 가을이니까. 전어 한 점을 입에 넣는다. 비릿하고 꼬들한 맛에 정신이 번쩍 든다. ‘Autumn Leaves’를 튼다. 이 곡은 비 내리는 가을날 전어를 먹으면서 들어야 한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한 점의 전어 그리고 소주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이 곡은 완벽해진다. 지금 전어를 오물거리고 있는 이 순간이 완벽한 것처럼.



Somethin' Else(BlueNote, 1958)

 

Julian Cannonball Adderley(as)

Miles Davis(tp)

Hank Jones(p)

Sam Jones(b)

Art Blakey(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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