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재즈를 주제로 브런치에 올린 글을 모아 책을 낸 후, 출판기념회를 핑계 삼아 오랜만에 친구들과 조촐하게 모였다. 책을 건네받은 친구가 훌렁훌렁 훑어보더니 ‘네가 무슨 재즈람?’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자식, 나이 먹더니 점점 허세가 느네?”
나는 대답 대신 그 자식에게 맥주와 소주를 함께 따라주었다. 그 입 다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평소보다 소주를 더 많이 부었던 것 같다.
그때 미처 하지 못한 반론을 하자면 예전부터 내 관심은 다들 좋아하는 것들에 있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나 말고도 좋아할 사람이 도처에 널려 있으니까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사랑받을 것들은 어떻게든 사랑받게 되어 있다는 논리랄까. 전 국민이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할 때 넥스트에 오열한다거나 모두가 아이언맨의 안위를 걱정할 때 슈퍼맨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든가, 수많은 인파가 북적북적 모인 나이키 매장을 피해 굳이 남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브룩스 러닝화를 신고 뿌듯해하는 것. 이런 건 모두 허세가 아닌 (잘 나가는 것들을 질투하는 약간의 치졸함과) 소수 취향에서 나오는 것이다.
재즈 역시 이 경로를 타고 내게로 왔다.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에서조차 저조한 판매량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하니, 재즈라는 음악은 내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한 셈이다. 이 음악은 누가 뭐래도, 너무너무, 소수 취향이지 않은가.
재즈평론가도, 재즈 연주자도 아닌 나에겐 이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는 음악을 본격적으로 들을 만한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재즈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했다. 이제 막 재즈에 발을 들인, 음악 경력은 없지만 재즈를 사랑하는 마음이 돋아나기 시작한 미래의 재즈광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리라. 그러니 어렵고 복잡한 지식은 잠시 저쪽으로 제쳐두기로 하자. 대신 평범한 비전문가가 재즈 듣는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재즈를 듣는구먼. 나는 이렇게 들리던걸?’ 하는 식으로 재미를 붙여가며 더 나은 리스너가 될 채비를 갖추는 게 좋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황덕호, 최규용, 테드 지오지아 같은 기라성 같은 재즈평론가들의 매력적인 서적들이나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반스의 자서전이나 평전을 탐독하며 본격적인 재즈광의 길로 접어들게 될 테니까. 어쩌면 재즈 연주가의 길로 들어서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이 글들은 비전문가에서 전문가로 가는 사이에 놓인 교두보가 되길 바라며 쓴 것들이다.
이것이 재즈를 다룬 글들에서 재즈에 대한 고급스러운 지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이런 식의 비움이 재즈라는, 이 불친절하지만 재미있는 음악에 조금이라도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카펫을 깔아주고자 하는 저자의 배려라 생각해주길. 그러니 (다 까발려놓고 이런 말을 하긴 민망하지만) 저자의 무식과 무지에 관한 건 부디 모른 척해주길 바란다.
재즈를 듣는다는 건 남들은 모르는 재미를 나만 즐기는 셈이다. 다시 말해 유튜브 검색창에 ‘재즈’라고 처넣는 대신 스포티파이에 굳이 마일스 데이비스의 ‘So What’을 검색해 듣는,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는 것이다. 마치 찾아가기 힘든 골목 귀퉁이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 좋은 돈가스를 파는 <왕자돈까스>의 몇 안 되는 단골이 된 느낌이랄까. 이 맛있는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왕자돈까스>의 등심 돈가스를 인스타그램에 태그 하듯, 재즈와 같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음악에게 조명을 (비록 내가 가진 조명이 핸드폰 손전등만큼도 안 되는 밝기일지라도) 비춰주고자 하는 마음을 그림과 함께 글로 담았다. 지금도 누군가의 일터에서 노동요로 연주되고 있을 ‘재즈’라는 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어주시리라 믿는다.
아, 마지막으로 그 빌어먹을 친구 녀석에게 한 마디만 하겠다.
‘진짜 안 보면 이 마지막 한 마디가 무슨 소용이람?’라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어찌 되었든 우린 재즈라는 한 배를 탄 동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