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락 이강휘 Jun 02. 2021

한적한 산책로를 혼자 거닐며 듣는 재즈

<Sunrise>, Emil Brandqvist Trio

큰일을 앞두고 기도를 해야 마음이 놓이는 아내를 따라 가끔 절에 가는 일이 있다. 종교는 없지만 절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설명하기 힘든 안온한 기운이나 잔잔한 목탁 소리가 좋아서 곧잘 따라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거리가 멀거나 너무 높은 암자에 오르자고 할 때는 망설여지는데 안타깝게도 이번 아내의 목적지는 두 조건을 다 갖춘 곳이다. 기도발 잘 받는다는 영험한 암자는 왜 다들 먼 산꼭대기에 있는 건지.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암자에 오르지 않아도 되니 데려다만 달라는 제안을 해온다. 그럼 딸은? 이 효녀는 엄마랑 같이 올라간단다. 아, 그럼 혼자만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얘긴 건가. 그렇다면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지.


딸이랑 아내를 배웅한 후 주차장 주변에 난 산책로를 천천히 걷는다. 기도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는 사람들만이 오는 곳이라 그런지 산책로는 대체로 한산하다. 길 왼편에 흐르는 계곡이 눈부신 봄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마치 신음처럼 뱉어내는 빛 때문에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다.  빛 받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 반짝이는 풍경에 자꾸 눈이 간다. 산책로를 둘러 조성된 큰 나무들이 선선한 그늘을 만들어준 덕분에 웬만큼 걸어선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쾌적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도 제법 운치 있다.

바닥에 놓인 야자 매트 위엔 빛 덩어리들이 불규칙하게 뿌려져 있다. 나뭇잎 사이의 공간으로 들어온 빛들이 만들어낸 흔적들이다. 스테인드글라스에 투사하는 것과 닮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종교적이고 엄숙한 스테인드글라스와 달리 숲에 들어선 빛들은 온순하고 그래서 안온하다.

아, 이런 걸 세세하게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라니! 역시 나란 사람은, 하고 혼자 우쭐해 하고서는 이내 민망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분위기를 바꿀 겸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산책로에 어울릴만한 노래를 고른다. 이런 곳에서는 미국보다는 유럽 재즈가 좋다. 에밀 브란키스트(Emil Brandqvist)가 좋겠다. 이 트리오는 잔잔한 가운데서도 드라마틱한 구성이 돋보이는 연주를 들려준다. 북유럽 예술 특유의 묵직한 느낌이 곡에 그대로 스며있어 밝은 곡도 가볍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에는 <Sunrise>가 꼭 맞겠다.

투오마스 투루넨(Tuomas Turunen)의 피아노 음색이 부서지는 빛처럼 내린다. 곧 규칙적으로 둥둥하고 울리는 막스 토른베르크(Max Thornberg)의 베이스가 기분 좋게 귀를 감싼다. 들려오는 음악의 박자에 맞춰 다시 산책길을 걷기 시작한다. 서정적인 테마가 끝나고 피아노 솔로가 시작된다. 바람을 타는 듯, 물이 흐르는 계곡의 소리를 듣는 듯 느긋하다. 그의 연주에 속도를 맞춰 걷는다. 곡이 전개됨에 따라 템포가 빨라지면 내 걸음도 빨라진다. 산들 부는 바람에 빠른 걸음도 상쾌하다. 한창 속도를 높이던 피아노가 돌연 템포를 늦춘다. 잠시 뒤 느리지만 착실하게 피아노를 좇고 있던 베이스가 도착한다.

그는 섬세한 즉흥연주로 고요하고 몽환적인 자연을 그린다. 그가 묘사한 자연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과 매우 닮아서, 혹시 그와 함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베이스의 즉흥연주를 들으며 숨을 고르고나면 비로소 뒤편에서 묵묵히 뒤를 받치던 드럼 연주가 들린다. 삭삭 긁는 브러시는 때론 흐르는 물소리처럼, 혹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에밀 브란키스트(Emil Brandqvist)의 드럼 덕분에 산책로는 실감을 얻고 구체화 된다.

곡의 제목처럼 제힘을 주체하지 못해 사방을 밝히고 마는 햇살의 밝은 이미지를 선명하게 그려낸 이 트리오의 연주에 나는 마치 르누아르의 <숲속의 경로>  사내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늘 사이에 내려앉은 빛들과 빛을 받아 반짝이는 나뭇잎, 상쾌한 바람에 몸을 맡기는 나뭇가지, 숲을 가득 채운 푸른 색채들. 투명한 자연을 온전히 담아낸 이 곡 덕분에 숲속에서나 느낄 법한 황홀경을 절 앞에 조성된 산책로에서도 느낄 수 있게 된다. 저 오솔길 끝엔 봄의 기운을 만끽하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긴 산책로를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끈다.

오귀스트 르누와르, '숲속의 경로'(1874)

아내에게서 곧 도착한다는 전화를 받고서야 현실로 돌아온다. 저기 보이는 암자 출구에 기도를 마친 아내와 딸이 다정히 손을 잡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손을 흔들고 있는 나를 보고 딸이 달려와 안긴다. 다리 아프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괜찮단다. 아내가 절을 하는 꼬맹이를 찍은 영상을 보여준다. 절을 어찌나 차지게 하던지 이정도면 없는 소원도 들어줄 것만 같다. 어떤 소원을 빌었냐고 물었더니 아빠 책 잘 팔리게 해달라고 빌었단다. 책이 많이 팔리면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많이 사줄 수 있을 테니까. 기특한 것. 공사가 다망하실 부처님을 대신해 내가 더블 비안코를 사왔다. 딴에 힘들었는지 달게도 먹는다.

열어 놓은 창문 안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밑에 샤베트로 입가심'하고 있는 딸과 조그마한 입을 닦아주고 있는 아내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달뜬다. 왠지 다음에는 셋이서 함께 암자를 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귀스트 르누와르, '여름 풍경'(1864)



Breathe Out(Skip, 2013)

Drum_Emil Brandqvist

Piano_Tuomas Turunen

Bass_Max Thornberg


재즈 좋아하세요?


이전 03화 숨 막히는 퇴근길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듣는 재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