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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May 26. 2021

숨 막히는 퇴근길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듣는 재즈

<Lawns>, Carla Bley

힘겹게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주저앉는다. 겨우 하루를 마쳐냈다는 안도감에 일단 한숨 한 번. 집을 향한 먼 여정을 생각하며 또 한숨 한 번. 시동을 켠다. 아침에 듣던 라디오가 들린다. 뉴스 따위는 듣고 싶지 않지만, 버튼을 눌러 음악을 켤 여력도 없고 혼자 있는 차 안에 적적함도 견디기 힘드니 머리 아픈 얘기라도 그저 틀어 놓는다.

살아있는 장애물 같은 차들이 자꾸만 내 앞을 가로막는다. 속도가 점점 더 더뎌지고 내비게이션 도착 예정시간은 늘어난다. 정체된 차 안에서 ‘족발의 통념을 깨는 족발’이라든지, ‘싱싱팔팔 회’ 같은 옆 차선 트럭에 적힌 문구를 읽으며 저녁 안주를 생각한다. 잠시 방심한 틈을 타고 옆 차가 머리를 들이민다. 어휴, 그래, 너도 네 딴에는 장애물을 넘는 거지, 하고 양보하기로 한다. 근데 그 틈을 비집고 차 한 대가 더 들어온다. 이런, 한 대 보냈으면 내 다음 차례에 들어오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든다. 경적을 울리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으나, 아뿔싸. 이미 늦었다. 이런 무례를 저질렀다면 비상 깜빡이라도 켜는 게 인간의 도리 아니던가. 하지만 앞차의 라이트는 끝내 켜지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마음속에 보편적 도덕 법칙을 내재하고 있다던 칸트 선생은 틀렸다. 지금 저 운전자는 승리감에 도취해 있으리라. 양보하는 사람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억울한 기분이 든다.

이런 상황이니 라디오 뉴스가 덧없이 들린다. 부동산값이 올랐는데 뭐 어쩌라고. 인간들이 저렇게 무례한데.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금리를 올리면 내가 집에 좀 일찍 갈 수 있다든? 이런 반항기 어린 생각이 들 때쯤, 불현듯 강렬한 빛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강 아래로 사라지기 직전 태양이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단말마처럼 내뿜는 빛이다. 파랑과 주황, 노랑이 뒤섞이고 강과 하늘 사이 경계는 모호해진다.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문뜩 <Lawns>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라디오를 끄고 음악을 켠다.

아쉽게도 원곡은 유튜브에서 찾을 수 없다. 대신 라이브의 맛이 살아 있는 영상으로 대체.

래리 윌리스의 피아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음과 음 사이 공백이 많은 피아노, 거대한 울림으로 공간을 메우는 베이스가 차 안을 가득 채운다. 밴드의 리더 칼라 블레이가 연주하는 오르간의 미세한 떨림이 들린다. 깊은 울림을 지닌 드럼도 듣기 편하고 적절하게 정제되어있는 기타 솔로도 곡과 잘 어우러진다. 단순하지만 단조롭지 않은 멜로디, 곳곳에 남겨진 여백 덕분에 곡이 끝나고 나서도 여운이 길게 남는다. ‘잔디밭’이라는 곡명과 달리 <Lawns>의 색감은 전반적으로 따스한 느낌을 주는 불그름한 빛에 가깝다. 어디선가 이 곡이랑 비슷한 색감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하고 기억을 되짚는다. 그리고 곧바로 <Orange and Yellow>를 떠올린다.

마크 로스코, Orange and Yellow(1956)

색채를 도구로 인간 본연의 감정을 그려낸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뚜렷한 형태 없이 오로지 색으로만 이루어졌기에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보이는 대로 보고 느껴지는 대로 느낄 수밖에 없다. 미국 내셔널 갤러리에서 관람객들에게 질문을 했다. ‘미술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그중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의 70%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단다. 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을 보고선 눈물을 흘릴만한 그 무엇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색채에서 나는 인간 본연의 고독을 본다. 과감하게 형태를 없애버리고 오직 색채로 채워진 캠퍼스를 대면할 때, 우리는 항시 곁을 맴돌고 있는 고독과 무력감을 체감한다. 이 정도라면 ‘꽤 불편한 작품이네.’하고 말았을 텐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Orange and Yellow>에서 보이는 주황과 노랑의 만남은 한 고독과 또 다른 고독이 손을 잡는 순간과 닮았다. 여기서 발견되는 고독끼리의 끈끈한 연대감이 외로움에 잠재된 고통과 우울을 무력화시킨다. 오직 색채만으로 채워진, 어쩌면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그의 그림을 통해 내 내면의 어두운 곳을 직면하면서도 위로와 위안을 얻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Lawns>의 연주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단순한 멜로디로 이루어진 즉흥연주를 듣고서 그 황홀감에 홀려 칼라 블레이를 궁금해한다면 모를까, 그 실력을 비하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그것은 그 곡에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Lawns>을 듣고 있으면 묘한 위안과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섣불리 위로하지는 않는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도 그렇다. 두 작품이 주는 위로는 동정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대신 감상자가 직접 자기 삶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들이 스스로 위로를 찾아가도록 안내할 뿐이다. 그 길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능동적으로 위안을 찾고 자신을 어루만지게 된다.


하루가 저무는 모습은 단조롭다. 어제도 해는 저렇게 졌고 내일도 틀림없이 저렇게 질 것이다. 우리 대부분의 일상도 그렇다. 내일도 틀림없이 나는 차 안에서 꼼짝없이 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내 앞을 끼어드는 차를 보며 도로교통법의 비현실성과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 토로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홀로 차에 올라타겠지.

이런 지경임에도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건, 늘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보지 못하고 있었던 지는 해를 발견하는 기쁨과 노을과 더불어 <Lawns>라는 곡을 듣는 호사가 퇴근길 교통체증과 월급을 꼬박꼬박 강탈해가는 스포티파이 덕분이라는 사실을 - 아주 가끔이지만 -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이 생고생 덕분에 <Orange and Yellow> 레플리카나마 지를 수 있는 월급이 들어오는 거라고 합리화해버리는 내 허영심이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늘 저녁은 내게 강 같은 평안과 위안을 주는 이 모순적 상황과 근본 없는 허영을 위해, ‘족발에 통념을 깨는 족발’에다 소주 한 잔!


2018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서 칼라 블레이가 연주한 'Lawns'



Sextet(WATT, 1987)

 Organ_Carla Brey

 Guitar_Hiram Billock

 Piano_Larry Willis

 Bass_Steve Swallow

 Drum_Victor Lewis

 Percussion_Don Al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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