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리옹까지 스며든 인연들
빛나는 나의 도시, 리옹
가을이 한창이던 리옹의 고성 같은 기숙사 건물에 도착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이렇게 새로운 곳에서 적응해야 하는 것도. 내가 지내던 방은 크지는 않았지만 야경이 정말 아름다운 방이었다. 이케아에서 별 모양의 귀여운 전구도 사고 마음에 드는 침구도 사고 낯선 곳에서 그렇게 내 일상을 만들어내는 게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비유 리옹이라는 리옹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지역을 지나 퍼니큘라를 타고 상쥬라는 이름이 예쁜 역에 내린다.
맥주보다 저렴한 와인을 한 병 살 수 있는 슈퍼마켓을 지나, 조금 후미져서 무서울 때도 있는 주택가 옆
오솔길을 지나면 그제야 안심이다. 고성 같은 레지던스 건물로 들어가 담배 냄새가 쩔은 복도에서 떠들던
애들을 지나, 적당히 지저분한 공용 키친을 지나면 내 방이 나온다.
밤에 들어와 아무리 피곤해도 계단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Bonsoir! 인사 정도는 경쾌하게 나누던 그때.
내가 리옹에 있을 때.
리옹 어학원 - Alliance Française
내가 다닌 어학원 알리앙스 프랑세즈(Alliance Française)는 전 세계에 분원을 둔국제 교육 기관이다.
단순히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랑스 문화를 전파하고 각 나라 간 문화교류를 증진하는 역할도 한다. 한국에도 전국에 여러 분원이 있다. 영국과 스페인에서 다녔던 어학원들과 달리, 이곳의 수업은 훨씬 더 학구적인 느낌이었다. 영국과 스페인에서는 주로 회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문법, 읽기, 쓰기까지 골고루 다뤘다. 덕분에 프랑스어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지만, 두 달 동안 겨우 현재 시제 정도 끝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내가 할 수 있는 프랑스어는 주로 오늘 일이나, 만고불변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시절 재미있게 배웠던 프랑스어를 다시 공부하며 느꼈던 즐거움은 여전했다. 같은 라틴어 계열인 스페인어와 비슷한 단어들이 많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발음과 억양만 다를 뿐 뜻이 비슷한 단어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인연이 이끄는 길, 런던에서 리옹으로
런던에서 만난 Soo 언니는 원래 1년을 계획하고 런던으로 떠났다고 했다. 내 여행 계획을 듣고는 런던에서의 일정을 변경해 리옹으로 왔다. 디자이너로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던 언니는 어느 날 거울 속 흰머리들을 발견하고는 이건 아니다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혼자일 거라 생각했던 여정이었지만, 런던에서 맺어진 인연의 씨앗은 리옹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나와 함께 프랑스어를 배우고, 우리의 참새 방앗간이던 Zara에 들러 옷을 구경하고, 기숙사로 돌아와
애호박을 잔뜩 썰어 넣은 수제비를 만들어 먹던 Soo 언니가 있었다.
또한, 소피도 리옹으로 석사 공부를 하러 같은 시기에 왔다. 그녀를 런던 빅토리아 역에서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우리가 언제 또다시 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엉엉 울었는데, 그랬던 그녀와 재회했다.
소피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면서도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게 할 수 없다며 나를
가족 크리스마스 식사에 초대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리옹에 찾아와 사랑을 고백했던 그가 있었다.
런던 어학원에서 나와 같은 반이었던 그는, 정작 그때는 쑥스러워 아무런 표현도 하지 못했다. 같은 도시 안에 있으면서 한여름의 짧은 연애를 즐기던 여느 학원 친구들과 다르게, 우리가 모두 런던을 떠난 뒤에야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전했고, 내가 있던 리옹으로 찾아왔다.
긴 여행의 끝에서 만난 리옹의 겨울은 생각보다 쓸쓸하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했다.
유럽에서 살아보는 여행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장거리 연애를 지속하다가, 서로의 꿈을
좇으면서도 함께할 수 있는 곳인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삶을 함께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는 8년이라는 시간을 연인으로 함께했다가 헤어졌다.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자리 잡고 결혼해 가정을
이룬 것처럼, 그는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에서 자신의 기반을 마련했고, 역시 가족이 생겼다고 한다.
내가 고민 끝에 내렸던 모든 신중한 결정들과 순간순간의 충동적인 선택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이 곳에 있게 되었고, 그 여정에서 이 모든 사람들을 우연히 만났다. 그렇지만 1년간 살아보는 여행 속에서 내게 일어난
모든 일과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만큼은 내 선택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운명이었던 것만 같다.
마치 우리가 걸어야 할 길 위에서, 만나야 할 순간에 정확히 맞춰 서로의 삶에 스며든 것처럼 말이다.